같은 해 11월 현대그룹은 5조 5400억원을 써내며 현대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한 달 뒤 우선협상자 지위를 박탈당했다. 그러자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유상증자, 회사채 발행 등으로 쌓아놓은 2조원 가량의 현금으로 은행권 대출을 대거 상환하면서 다음 해 4월 현대그룹은 주채무계열에서 제외됐다.
현대그룹의 맏형이자 가장인 현대상선(011200)의 영업실적 부진이 수년째 이어지면서 시장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대상선(A- 안정적), 현대엘리베이터(A 안정적), 현대로지스틱스(BBB+ 안정적) 등 현대그룹은 17회 SRE에서 워스트레이팅 공동 1위에 올랐다. 전체 109명 가운데 36명(33%)이 현재 현대그룹의 신용등급이 부적정하다고 지적했다. 현대그룹은 지난 16회 SRE(워스트레이팅 5위) 때보다 4단계나 높아졌다.
해운경기 악화 ‘직격탄’
“3년 전 주채권은행과 재무개선 약정만 맺었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현대건설 인수에 부정적일 수 있어 끝까지 거부했지만, 결국 다시 은행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 처지가 된 거죠.”
SRE 자문위원들은 현대그룹의 위기에 대해 자초한 측면이 크다면서도 살아나지 않는 해운경기를 근본적인 문제로 꼽았다. 해운산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 잠깐의 회복기를 거쳐 이내 긴 침체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컨테이너운임지수(CCFI)는 지난해 들어 운임 인상 노력으로 가파르게 상승했지만, 성수기인 3분기엔 재차 하락세로 전환하는 등 시황에 대한 우려가 여전하다. 건화물선운임지수(BDI)의 경우 초호황기였던 2008년 상반기 1만 1000포인트를 웃돌았지만, 금융위기 추락 이후 지난해도 추가 하락하며 1000포인트 수성조차 힘겨운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현대상선의 조정영업이익(EBIT)은 2011년 1분기 이후 지난해 4분기까지 8분기 연속 적자를 지속하고 있다. 올 1분기 역시 적자가 예상된다. 영업활동을 통한 현금 공급이 2년 이상 끊긴 셈이다.
3월말 기준 올해 만기도래하는 회사채 4800억원을 비롯해 연내 갚아야 할 단기성 차입금이 1조원을 넘어선다. 선박투자나 운전자본투자 등을 다 제외하더라도 최소 1조 3000억원 이상의 자금공급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반면 지난해 말 현대상선의 현금성 자산은 7000억원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쯤되자 은행들에게 등을 돌렸던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유상증자를 비롯해 보유한 현대증권 지분을 담보로 전환사채(EB)를 발행하는 등 다양한 자구계획을 추진중이다.
산업은행은 시중은행과 함께 현대상선 등을 지원한다는 방침이지만, 시중은행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재무개선 약정 체결을 두고 주채권은행이던 외환은행과 소송전을 벌이는 등 이미 시장의 신뢰를 저버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SRE 자문위원은 “현대상선의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됐고, 올해도 해운업황이 안 좋을 것”이라며 “지분 방어도 쉽지 않아 특단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신평사 측은 “특정그룹의 재무개선 약정 체결을 크레딧 이벤트로 보고 레이팅 액션(등급 조정)을 취한 적이 없다”며 “재무개선 약정을 맺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재무개선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경영권 방어비용 눈덩이
케이프포춘, 넥스젠 캐피탈 등 수 년째 지속된 우호지분 외에도 증권사 등과 TRS(Total Return Swap) 파생계약을 맺고 보유 지분에 대한 원금보장과 높은 이자 지급을 약속하며 의결권을 위임받았다. 대우조선해양도 2011년 8월 1000억원 규모(혹은 보통주 2% 중 적은 수량)의 백기사 역할을 맡았다.
현대엘리베이터(017800), 현정은 회장 등은 지난해 말 기준 현대상선의 지분 27.32%를 보유하고 있다. 의결권을 위임받은 우호지분을 모두 합칠 경우 38% 수준으로 높아진다. 범현대가는 29.13%를 보유 중이다. 이 와중에 그룹내 현금 화수분 역할을 하던 현대상선이 해운경기 악화로 흔들리면서 그룹내 위기감도 커지는 것이다.
현대상선이 현대로지스틱스의 2대주주이자 재무적 투자자인 우리블랙스톤PEF에게 투자자금 1000억원과 경과분 약정이자 상환청구권(풋옵션)을 부여한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현대로지스틱스의 7월 기업공개(IPO) 등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현대상선에 추가 자금 부담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은 묻는다
해운업황이 좀처럼 나아질 조짐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경영권 방어 비용은 오히려 계속 늘면서 지배구조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연 현대상선을 지배하기 위한 유지비용이 얼마나 더 들어야 하는 걸까요. 이제는 순환출자를 끊고 지배구조를 정비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한 SRE 자문위원은 현재로선 답이 나오지 않는 현대그룹의 재무구조에 대해 이 같은 처방을 내놨다. 일각에선 조심스럽게 현대상선 매각을 거론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상선의 경영권 방어 비용만 없다면 큰 문제가 없는 만큼 현대상선은 팔고, 현대증권 지분은 더 사들여 현대그룹의 명맥을 유지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현대상선은 현대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고 상징성도 큰 만큼 현실성은 희박하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현대그룹은 2013년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재계 21위(공기업 제외)로 15조원의 총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은 400%로 평균(108%)을 크게 웃돌고 있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가 제작한 ‘17th SRE’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17th SRE는 2013년 5월15일자로 발간됐습니다. 책자가 필요하신 분은 문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의 : 02-3772-0161, mint@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