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edaily 정명수특파원] 크리스마스를 앞둔 뉴욕 맨해튼 5번가(5th ave.남북 방향의 대로)는 쇼핑 천국이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백화점들이 전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뉴욕은 황금의 도시이기도 하다. 5번가 선상에 유명한 록팰러센터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 49번가(49th st.동서방향 대로) 일대는 세계에서 가장 큰 보석 거리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배경이 되는 보석상 티파니도 이곳에 있다.
이 보석 거리에서는 검은 코트에 검은 중절모를 쓰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바쁘게 걷고 있는 전형적인 유태인부터, 인도인, 이탈리아인,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 보석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 거리에는 금, 은, 다이아몬드, 각종 보석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다이아몬드를 도매로 거래하는 한 인도인 보석상의 사무실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신분증을 확인한 후, 두꺼운 방탄문을 지나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커다른 금고에서 하얀 종이에 담긴 `반짝이는 돌`을 꺼내와서는 진지하게 흥정을 했다.
맨해튼 남쪽에는 또 다른 `황금의 성`이 있다. 바로 뉴욕상품거래소(NYMEX). NYMEX에서는 수백톤의 금 선물을 거래하고 있다.
NYMEX 금선물은 100온스가 기본 단위다.(1온스=28.34그램, 1돈쭝=3.75그램) 온스당 센트 단위로 호가가 형성된다. 거래시간은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하루 최대 가격 변동폭은 75달러. 만기일에 실제로 주고 받는 실물은 순도 99.5%의 100온스짜리 금괴다.(그림 참조)
100온스짜리 한 개의 바(bar)로 된 것도 있고, 대략 1킬로그램 짜리 세개를 한 묶음으로 한 것도 있다. 각각의 금괴에는 NYMEX가 지정한 보석감정회사들의 인증 스탬프와 일련번호가 찍혀있다.
장황하게 뉴욕 금 시장 얘기를 꺼낸 것은 최근 달러 약세로 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을 향한 인간의 열정은 역사 이래 계속되고 있다. 금은 인간의 역사, 특히 경제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황금의 역사
금은 돈이다. 반짝이는 노란 금속 덩어리는 부(富)의 집적물로 간주됐다. 미국은 1792년 화폐를 금과 은에 연동시킴으로써 통화제도에 금을 도입했다. 이같은 금본위제는 고전적인 통화정책이었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 금본위 체제는 통화 시스템의 주류였다. 돈이 금의 지지를 받는 한 통화위기가 올 이유가 없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금본위제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었다. 경제가 커지는 만큼 돈을 찍어야했고, 그에 맞춰 금을 확보해야했다. 전세계적으로 대공항이 엄습했고,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금본위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금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1944년 브래튼우즈 체제부터다. 달러가 전세계 기축통화가 됐고, 달러는 금 1온스에 35달러로 고정됐다. 브레튼우즈 체제도 금본위제와 마찬가지로 화폐 가치를 무엇인가에(금과 달러에) 고정시키려는 시도였다.
고정 틀이 튼튼하면 문제가 없지만, 기준이 흔들리면 만사가 불안해진다. 2차 세계대전을 거쳐 냉전시대에 돌입한 이후 미국은 서방 자본주의 경제의 큰 형님이었다. 그러나 무역이 확대되고, 미국의 국제 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브래튼우즈 체제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71년 8월5일 닉슨 대통령은 달러화에 대한 금 태환을 정지한다고 공식 발표한다. 브레튼 우드 체제는 붕괴됐고, 금은 `돈의 기능`을 상실했다.
금의 역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1979년 2차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금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80년 1월 온스당 850달러까지 상승했다. 지금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900달러에 달한다. 금 값은 `위기의 값`이고, 금의 역사는 `위기의 역사`다.
두차례 오일쇼크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금은 내리막 길을 걸었다. 냉전 막바지 미국은 쌍둥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고, 지금처럼 달러 약세로 이를 돌파하려했다. 마침내 1985년 플라자 합의에 도달한다.
1987년 여름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은 금리를 인상한 독일로 날아가 다시 한번 노골적으로 약한 달러 정책을 강조해야했다. 그해 10월 주가가 대폭락하는 블랙먼데이가 월가를 덮쳤다. 금융 부문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크게 상처받았고, 주가는 급락했다. 반대로 금 값은 다시 400달러를 넘어섰다.
암울한 1980년대, 냉전이 막을 내렸다. 잘 생긴 남부의 풋내기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 됐고, 세계 경제도 새로운 도약기를 맞았다. 금은 인기가 없었다. 서부 실리콘 밸리에서는 모래로 금(반도체)을 만드는 현대판 연금술사들이 등장했다. 미국인들은 금보다는 주식을 좋아했고, 실제로 기술주는 금같은 대우를 받았다. 진짜 금은 빛을 잃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쳐왔을 때 금이 반짝 빛을 발한 적이 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세계 중앙은행들은 금본위제라는 과거의 전통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금을 팔기로 합의했다. 금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때 맨해튼의 마천루 트윈 타워가 무너졌다. 바로 옆 NYMEX에서 금 선물은 다시 생명을 얻었다. 부시 대통령은 쌍둥이 적자를 부활시켰고, 달러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식시장의 거품도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이라크에서, 사우디에서, 미국에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질 때마다 금은 음흉한 미소를 던졌다. 2004년 11월 금 선물 가격은 1988년 이후 처음으로 450달러선을 돌파했다.
◇Snake Oil
금은 불안을 치유하는 약이다. 경제가, 정치가, 사회가 불안하면 사람들은 금을 찾는다. 실제로 금은 병을 치료하는 약이다. 호주의 발라라-오스틴 방사성 종양 센터에서는 전립선 암 환자들에게 금가루를 주입, 암치료에 활용하고 있다.
금은 인플레와 디플레를 모두 방어할 수 있다. 달러 약세의 피란처이기도 하고, IT 버블 이후 주식 투자의 아픔을 달래주는 투자 수단이기도 하다. 연준리가 금리인상으로 방향을 바꾼 후 금이 채권 투자를 대체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금은 정말 `만병통치약`일까, 아니면 겉만 번지르한 `가짜 묘약(Snake Oil)`일까.
금 시장의 최대 위협 요소는 각국의 중앙은행이다. 연준리 등 주요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은 3만2000톤으로 현재 전세계 광산에서 채굴되는 금 12년치에 해당한다. 브래튼우즈 체제 붕괴후 금은 더 이상 돈이 아니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금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1999년 15개 주요 중앙은행들은 협약을 맺고, 시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보유 중인 금을 매각키로 했다. 올해 3월 이 협약이 갱신됐다. 앞으로 5년간 500톤의 금을 매각키로 했다. 프랑스도 최근 보유 중인 금 600톤을 5년간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중앙은행은 점점 더 영악해지고 있다. 가치없는 자산을 팔고, 수익을 최대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자, 중국이, 러시아가 외환보유고 중 달러 비중을 줄이겠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운동을 벌이자, 국제 금 시세가 크게 하락한 적이 있다. 중앙은행은 필요하다면 부채를 줄이기 위해 언제든지 금을 팔아버릴 준비가 돼 있다.
중앙은행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지만, 금 시장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최근 금 값 상승의 주요인이 달러 약세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 말고도 금 값을 끌어올리는 변수들은 많이 있다.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의 금 소비 욕구, 중국의 금시장 자유화 가능성이 대표적이다. 특히 중국 변수가 중요하다. 위안화가 달러 페그제에서 풀리는 순간 금이 한단계 레벨 업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세계 주요 금생산 업체들이 참여하는 월드골드카운슬(World Gold Council)에 따르면 지난 3분기 보석으로써의 금 수요는 6% 증가했다. 반면 금 생산과 중앙은행의 금 매각은 22% 감소했다. 금화, 금괴 투자도 10%나 늘어났다.
금이 본격적인 투자 대상으로 부상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뉴욕증권거래소에는 금시세에 연동되는 `상품 ETFs(Exchange-Traded Funds)가 최초로 상장됐다. 이 ETFs에 투자하면 금 선물을 매수한 것과 똑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개인 투자자들 앞에 글자 그대로 `황금시장`을 열어준 셈이다.
◇불안한 미래
금의 주요 생산 국가는 남아프라카, 미국, 호주, 캐나다, 중국,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이다. 금의 최대 소비국은 인도다. 인도인들은 금 값이 아무리 올라도, 금을 사는데 주저함이 없다. WGC에 따르면 인도의 금 소비는 3분기 중 16% 증가했다. 이같은 금 소비 증가는 지난해 인도 농사가 잘됐기 때문이다. 인도의 농부들은 돈이 생기면 금을 산다. 인도 금 소비의 60%는 농촌에서 이뤄지고 있다.
미국은 세계 2위의 금 소비국이다. 미국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이에서는 손자손녀들의 형상을 본딴 금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다. 미국의 젊은 연인들은 애인의 이름을 큼직하게 세긴 금목걸이를 교환하곤 한다. 미국인들에게 금은 투자의 대상이기도 하다.
중국의 수요도 무시할 수 없다. 3분기 중국의 금 수요는 6% 증가했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금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중국 경제가 커지고, 중국인들의 호주머니가 두둑해지면서, 금 수요가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수요가 늘어나는데 비해 공급은 부진하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금광이 공급 불안의 주범이다. 최근 남아프리카 최대의 광산기업 중 하나인 하모니 골드 마이닝은 경쟁사인 골드 필즈에 대한 적대적 M&A의 감행, 투자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금 생산성이 떨어지면서 광산기업간 합병이 해결책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금 값은 얼마나 오를 것인가. 시티그룹은 내년도에 금이 일시적으로 500달러선을 넘을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내년도 평균 금 가격은 425달러를 제시했다.
경제 구조의 격변기 금은 항상 급등세를 나타내곤 했다. 금 시장이 주목받고 있다면 무엇인가 큰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는 신호다. 변화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금은 `불안한 미래`를 반사하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