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펼쳐진 보고서 내용은 이랬다.
"한국에서 제철소을 건설하는 작업은 엄청난 외환비용 소요에 비해 경제성이 의심스럽다. 한국은 종합제철소 건설을 연기하는 대신 노동과 기술 집약적인 기계공업 개발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절망적이었다. 오랜 숙원인 종합제철소 건립을 위해선 IBRD의 긍정적 평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때 박 사장의 머릿속을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었다. 바로 일본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이었다. 경제개발을 위해 한·일 국교수립을 대가로 우리가 받을 돈이었다. '이 돈을 제철소 건설에 쓸 수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겠다는 심정으로 박 사장은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개월간 일본의 정·재계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그로부터 40년 후. 포스코(당시 포항제철)는 매년 세계 철강역사를 새로 쓰며, 세계 4위철강기업으로 우뚝섰다.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힘, 그것이 지금까지 세계 일류의 중후장대 산업을 육성해 낸 우리 기업의 힘이다.
◇'중후장대' 산업의 반란..더 이상 폄하하지 말라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지난 2006년 기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국내 중후장대 산업이 진입시킨 품목은 총 15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반도체, LCD 등 전자 분야가 12개인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중후장대 분야 숫자가 더 많다.
이건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니다.
전 세계의 고부가가치 선박은 국내 조선업체들이 싹쓸이 할 만큼 기술력도 세계적이다.
지난해 국내 조선업체의 수출액은 총 431억달러를 기록, 전체 수출액의 10.2%를 차지했다.
자동차, 반도체를 제치고 수출 1위에 올랐다. 특히 원부자재 국산화율이 85%로 수출로 획득한 외화는 대부분 국내경제로 유입된다. 그만큼 효자산업이란 이야기다.
실제로 포스코(005490)는 세계 최고의 출선비를 자랑한다. 출선비란, 고로의 단위면적당 생산되는 쇳물의 양을 뜻한다. 따라서 여타 글로벌 경쟁업체들에 비해 양질의 쇳물을 같은 시간 내에 훨씬 더 많이 뽑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바탕으로 포스코는 원가절감은 물론 품질, 가격 경쟁력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있다. 세계적인 철강리서치 기관인 미국의 WSD(World Steel Dynamics)에 따르면 지난해 포스코의 경쟁력은 세계 2위였다. 불과 40년만의 일이다.
◇중후장대 산업의 성공비결, '품질'에 있다
사실 국내의 중후장대 산업은 지난 70년대 산업개발기에 정부 도움을 받아 크게 성장했다. 정부의 각종 세제혜택과 산업 합리화 조치 등 '될 놈만 확실히 밀어 준' 정책으로 급성장한 셈이다.
덕분에 조선·철강·중공업으로 대변되는 국내 중후장대 산업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아울러 우리 경제도 그와 함께 외형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중후장대 산업이 한국경제를 떠받친 '아틀라스'가 됐던 시기였다.
한국경제를 받치는 '아틀라스'의 지위를 찾기 위해 중후장대 산업에게 주어진 숙제는 '품질'을 통한 생존 뿐이었다.
◇과감한 투자와 선제적 대응으로 '세계 1위' 고수
이같은 움직임은 조선산업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 일본 등 당시 세계적인 조선강국들과 겨루기 위해 한국의 조선업체들은 불황기에 과감한 투자를 감행한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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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조선업체들은 80년대와 90년대의 조선경기 침체때 구조조정과 투자를 통해 대규모화에 성공했다, 아울러 우수설계 인력을 양성했다. 그리고 이런 투자들은 결국 2000년대 들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현재 전세계 선박의 15% 가량을 건조,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이나 고부가가치 선박의 대명사로 통하는 삼성중공업의 투자가 대표적인 예다.
현대중공업(009540)은 이제 선박 뿐 아니라 선박 대형엔진 세계시장 35%, 프로펠러 40% 점유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해양설비인 초대형 FPSO(부유식 원유생산저장설비) 분야에서도 세계 1위를 유지하는 등 총 14개 제품에서 현재 세계 1위에 랭크돼 있다.
현대중공업은 올해 R&D에 총 2367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세계 경기 침체로 인해 전체 투자규모는 소폭 줄었지만 R&D 투자는 오히려 전년대비 37% 증가시켰다.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선제적 투자다.
삼성중공업은 해양 분야의 대표적인 성장 엔진인 드릴십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2000년대 들어 전 세계에서 발주된 44척의 드릴십 가운데 29척을 수주, 세계 시장 점유율 66%로 드릴십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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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중동지역에 '해갈의 기적'을 안겨준 두산중공업(034020)의 담수플랜트, 조선산업과 더불어 성장한 STX엔파코의 선박부품, 대우조선해양(042660)의 해양플랜트 등 과감하고 선제적 투자를 통해 이뤄낸 중후장대 산업의 역량은 눈부시다.
한 중공업 업체 CEO는 "더 이상 한국의 중후장대 산업이 몸으로 때우는 산업이라고 생각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오히려 중후장대 산업이 몸 뿐만 아니라 머리를 써야 하는 산업으로 발전했고 이를 통해 치열한 경쟁 속에서 현재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