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잘 봤냐고요? 지인이 보러 간다면 말릴 거예요.” 초등학생 딸을 데리고 지난 26일 ‘경복궁 야간개방’ 현장을 찾은 김은영(38) 씨는 “사람만 보다 간다”며 혀를 찼다. 수만명 관람객이 몰리다 보니 궁을 제대로 볼 겨를이 없었다. 야간개방 면적이 경복궁 전체 40% 수준이라 관람객이 근정전 등 특정 장소에만 몰려 더 적체됐다. 인파에 휩쓸려 아이가 다칠까 마음까지 졸였다. 고즈넉한 궁의 야경을 생각하며 어린 딸을 데려왔다가 되레 피로감만 얻고 갔단다.
22일부터 26일까지 공개된 닷새간 ‘경복궁의 밤’은 아수라장이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평일에만 하루평균 2만5000명이 훌쩍 넘는 관람객이 경복궁의 야경을 보고 갔다. 휴일인 주말에는 평일보다 많은 평균 3만여명이 다녀간 것으로 추산된다. 세 시간 반에 불과한 개방시간에 수만명의 인파가 몰리다 보니 궁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무너지지 않은 게 기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야간개방 둘째 날인 23일 오후 8시. 직접 경복궁을 가보니 정문(광화문) 밖에서부터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이 100m가 넘는 ‘인간띠’를 이루며 대기했다. 정문 밖에서 줄을 서서 근정정에 도착하기까지 50분이 넘게 걸렸다. 성인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평소 5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한 시간여 만에 도착한 셈이다. 사전예매 없이 경복궁을 찾은 관람객들은 매표소에서도 최소 수 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7개의 매표소에는 현장에서 표를 사려는 관람객이 몰려 매표창구마다 30m가 넘는 줄이 늘어섰다.
운영 미숙이 문제다. 문화재청은 이번 경복궁 야간개방을 인원 무제한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관람객이 폭증하자 시작 하루 뒤인 23일 오후 뒤늦게 관람객 수를 4만명으로 제한했다. 관람객 안전사고와 문화재 훼손을 우려해서다. 이는 관람객 수요예측을 제대로 못했다는 소리다. 문화재청 측은 “지난해 상반기 야간개방 첫날에 관람객이 2300여명 수준이었다”며 “올해 첫날부터 이렇게 인파가 몰릴지 몰랐다”고 해명했다.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 하루에 수만명의 관람객이 몰리는 이유는 야간개방 기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2010년 하반기부터 시행된 경복궁 야간개방은 지난해부터는 상·하반기 연 2회 각 닷새 동안만 시행된다. 문화재청은 기간을 제한한 이유로 경복궁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업무 과부하(1일 15시간 근무), 경복궁 인근 청와대 보완 문제 등을 들었다. 하지만 관람객 분산을 위해서는 야간개방 연장이 필수적이다.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국민의 문화향수권이 화두인 시대다. 박근혜 대통령은 “온 국민이 문화가 있는 삶을 누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고궁은 자연과 전통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문화공간이다. 그 공간의 상시 개방은 도심 속 공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문화가 있는 삶’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일상 속 문화향수 확대가 바로 ‘문화융성’이다. 새로운 산업투자만이 길이 아니다. 신학용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민주당)은 “국민불편 해소를 위해 경복궁 야간개방 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6월 국회에서 문화재청에 권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야간개방 연장을 위해 경복궁 관리 인원과 예산 확충 방안이 적극적으로 검토돼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