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동안 서너 개의 신문, 잡지를 옮겨 다니다가 수년 전 미국의 모 경제 전문잡지 서울지국장을 끝으로 기자 생활을 마쳤다. 그렇지만 청춘과 중년을 보낸 삶의 터전이 이곳 서울이기 때문인지 아직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가족과 떨어져 한국에서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다. 필자와는 해외홍보 업무 일을 하던 대우그룹 신입사원 시절부터 만났으니 벌써 25년이 넘는 인연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미팅을 끝내고 종로 쪽에서 택시를 타려고 교보빌딩 후문 쪽으로 나왔다. 걸음을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인근 재개발 현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바로 ‘피맛골’ 거리였다. 흉측하게 허물어진 건물 사이로 아직도 몇몇 음식점들이 간판을 내걸고 아슬아슬하게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중, ‘oo 집’이 아직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감회가 새로운 듯 보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러했다. 그 조그맣고 초라한 식당은 언론 자유가 극도로 억압되던 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서슬 퍼런 정보 당국의 감시 눈길을 피해가며 민주화 투쟁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취재와 기사 송고에 지친 외신기자들이 늦은 오후가 되면, 약속이나 한 듯 삼삼오오 모여 돼지 기름에 지진 녹두 빈대떡 몇 점과 막걸리 한 주전자를 놓고 서로 갖고있는 취재정보도 주고 받을 겸 지친 하루를 풀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은 엄연히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당시 외신기자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란 것이다.
(이름도 특이한 ‘피맛골’. 말(馬)을 피해 다니는 골목길이란 뜻이다. 모든 국민이 양반과 상민으로 구분되던 철저한 계급사회인 조선시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종로를 지나다 말을 탄 고관들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한길 양쪽에 나 있는 좁은 골목길로 다니는 습속이 생겼는데, 피맛골은 이때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당시 해외홍보를 하기 위해서는, E-메일로 기사를 보내는 요즘과 비교해서 절차가 매우 복잡했다. 우선 영문으로 보도자료를 작성해야 한다. 국문 보도자료를 그대로 영어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 현란한 수식어나 사족을 일체 생략하고, 오로지 팩트 위주의 정확한 근거가 있는 내용만 포함되어야 한다.
각종 용어와 숫자는 두 세 차례 철저히 확인을 해야 하고 영어 문장의 맞춤법이나 철자도 전문가의 감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다음 외신기자 별로 매체 이름과 기자 이름이 명기된 편지 봉투에 보도자료를 집어 넣고 풀로 붙이면, 일단 배포 준비가 끝난다. 그 다음은 이를 일일이 직접 전달해야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퀵서비스 배달인 셈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외신기자들도 광화문 근처에 모여 있었다. 호텔 방 하나를 장기 임차해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국내 언론사 빌딩 내 사무실을 임대해 쓰고 있는 외신도 있었다.)
요즘은 외국어를 잘 하는 한국인 특파원수가 더 많지만, 필자가 해외홍보를 시작하던 1980년대만 해도 서울주재 외신기자들은 대부분이 경력이 풍부한 외국인이었다. 머리가 허연 60대 초반의 미국의 모 통신사 지국장은 한국전쟁 종군 기자였다는 얘기도 들었다. 당시 서울이 인기가 좋았는지(?) 서울지국장이 동경과 홍콩지국장을 겸임하고 있는 외신도 꽤 있었다.
당시 회사 홍보일로 자주 만났던 어느 미국의 유력 경제신문 지국장은 종종 자기가 송고한 몇 건의 기사 때문에 군사정권 블랙리스트 첫번째에 올라 있다고 농담반 진담반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기억도 난다. (얼마 후 실제로 그를 포함한 유명 외신 지국장 몇 명이 추방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아시아국가로 부임지를 옮겼다.)
민주화 시대인 요즘은 ‘외신기자 추방’ 같은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우리나라가 이제 국제 정치뉴스의 중심지가 아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동경이나 홍콩지국장이 서울지국장을 겸임하는 외신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좀 아쉽게 느껴진다.
문기환 새턴PR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