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은 지금의 낮은 물가는 중국의 저가공세에 따른 `위장된 물가`라며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했고 재경부는 무슨 소리냐, 물가가 낮은데 웬 금리인상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물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두 기관이 핏대를 세우고 있는 것일까.
◇근원물가 5년만에 최저..`디플레 가는 것 아니냐`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2.0% 올라 지난 2000년 5월 이후 가장 낮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근원물가는 1.9% 상승해 5년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제유가가 지칠줄 모르게 오르고 집값은 뛰는데 물가가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이자 경기회복은 커녕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물가가 낮은 이유에 대해 내수부진과 환율하락을 첫째 이유로 꼽았다. 경기가 부진해 기업들이 제품값을 올리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달러/원 환율이 떨어지면서 수입물가 상승압력이 완화됐다는 것이다.
내수와 직결된 서비스물가가 안정된 것도 물가의 하향안정을 이끄는 요인으로 분석됐다. 서비스물가는 지난 1월을 제외하고 올해들어 단 한차례도 3%대를 기록한 적이 없다.
성명기 한국개발연구원 박사는 "환율하락이 원자재값 상승 충격을 상당 부분 상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내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서비스물가가 낮은 것도 물가안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함정..할인점·물가지표
환율하락과 내수부진이 거시적 물가하락 요인이라면 이마트와 홈플러스 같은 대형 유통업체의 등장, 소비자물가 산출방식 등의 문제는 미시적 요인에 속한다.
대형할인점이 여기저기 생겨나면서 판매가격이 뚝 떨어지고 인터넷에 사이버 쇼핑몰이 우후죽순 등장하며 가격하락 경쟁에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 영세상인들은 값을 올리고 싶어도 경쟁에서 밀릴 것을 우려해 속만 태운다.
소비자물가 품목산정과 가중치도 물가를 실제보다 낮게 평가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집세다. 전세는 소비자물가 조사품목중 가중치가 가장 높고, 월세는 휘발유 다음으로 높다.
집값과 전월세가 같이 오른다면 통계적 착시가 덜하겠지만 집값은 오르는데 전월세가 안정돼있다면 소비자물가는 덜 오르는 현상이 나타난다. ☞관련기사: 물가와 집값 `따로` 논다 이밖에 소비자물가 조사품목이 지난 2000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경제변화를 제때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은·재경부, 동상이몽(同床異夢)
한은과 재경부의 신경전은 너무 낮은 물가를 서로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데서 생긴다. 한은은 위장된 물가라고 주장하고 재경부는 내수부진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반박한다. 이는 결국 금리를 올리느냐 마느냐의 치열한 금리논쟁으로 이어진다.
박 총재는 추어탕 재료가 되는 미꾸라지를 예로 들며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미꾸라지가 중국에서 싼값에 수입되면 물가는 오르지 않는다"며 "(지금은) 위장된 물가안정"이라고 진단했다. 겉보기와 다르게 국내 경제에 수요측 물가상승압력이 잠재해있다는 설명이다. ☞관련기사: (BOK워치)미꾸라지 물가론
반면, 한덕수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근원물가가 한은의 목표범위인 2.5~3.5%를 벗어날 정도"라며 "금융통화위원회는 물가안정이 위협받기 때문에 금리를 올려서 총수요를 낮춰야 하는가에 대한 고려를 먼저해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은과는 반대로 수요측 상승압력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선제적 대응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한은은 금리를 올리겠다고 하고 재경부는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참아달라며 금리동결을 주문하고 있다.
발등의 불부터 끄자는 재경부 논리에 `위장된 물가`라는 한은의 주장은 아직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은에 얄미운 시어머니 역할을 기대하면서도 한은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손민중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장기적으로 국내경제가 물가상승압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지금의 물가를 보면 뭔가 특이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수요측 요인인지, 물가지표 자체의 문제인지 따져봐야겠지만 한은도 `위장된 물가`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은의 태도가 미온적일수록 낮은 물가를 근거로 한 재경부의 공세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은으로서도 난감한 문제다. 통화정책을 결정할 때 물가와 성장, 자원배분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한 것도 물가만으로는 금리인상 논리가 부족하다는 것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재경부는 한은의 약점을 제때 건드렸다.
◇한은, 전화위복 노린다.."모든 가능성 검토"
한은과 재경부의 논쟁이 일단락되더라도 물가는 다시 한번 세간의 관심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 내년은 한은이 설정한 2004~2006년 중기물가안정목표가 끝나는 해다.
재경부와 협의과정에서 지금의 목표대로 근원물가 기준 2.5~3.5%를 유지할 수도 있고 변화된 흐름에 맞춰 목표범위를 아예 하향조정할 수도 있다. 혹은 기간을 재설정한다거나 물가지표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쪽으로 논의가 전개될 수도 있다.
지금 벌어지는 한은과 재경부의 물가논쟁이 심상치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은은 그 논쟁의 중심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은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물가지표에 대한 연구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며 "내년 물가목표를 협의할 때 근원물가 목표수준을 낮추거나 목표대상을 바꾸는 등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