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영화기행]엘리타가 꿈꿨던 과나후아토

터널에 도시가 얹힌듯
  • 등록 2006-06-28 오후 12:35:00

    수정 2006-06-28 오후 12:35:00

[과나후아토(멕시코)=조선일보 제공] 처음엔 엔진 소리로 여겼다. 밤 두 시. 멕시코시티로 떠나는 비행기가 뉴욕의 활주로를 벗어날 때 계속 소음이 들렸다. 이륙한 지 한 시간, 화장실을 갈 때야 알 수 있었다. 구석 자리 어느 사내가 홀로 울고 있었다. 그는 한참 뒤에야 잠들었다.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 하지만 누군가의 울음을 들었던 자는 끝내 잠들지 못했다.


▲ ‘달의 피라미드’에 오르면 기원전 2세기 건립된 고대 도시 테오티와칸 전경을 볼 수 있다.

◆멕시코시티의 마리아치

‘가르시아’는 이미 죽은 가르시아의 현상금 붙은 머리를 찾아 헤매는 베니의 로드무비. 베니가 일했던 술집을 찾아나섰다. 멕시코시티 가리발디 광장엔 극 중 술집 ‘틀라케파케’가 여전히 간판을 내걸었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건물 전체가 헐릴 예정이어서 폐업했다는 말을 들으니 맥이 풀렸다.

근처 술집 ‘테남파 바(Bar)’에 들어가 테킬라를 홀짝일 때 3인조 마리아치가 찾아왔다. 실력은 조금 떨어졌지만 최선을 다해 노래하는 그들을 보니 금세 푸근해졌다. ‘관타나메라’를 부를 땐 즉석 가사를 덧붙이기도 했다. “우린 한국 손님을 위해 노래한다네. 한국은 멋진 나라지.” 한 곡에 2000원. 돈으로 노래를 살 수 있다니.

베니는 바텐더이면서 악사였다. 술과 음악은 그가 세상을 위로하는 방법이면서 자신의 삶을 끌고 가는 도구였다. 바깥 어두운 광장엔 손님을 기다리며 노래하는 마리아치로 가득했다. 음악이 음표 사이의 잃어버린 바이브레이션을 추구할 때, 여행객은 영화와 실제 촬영지 사이에서 증발된 시간을 추념했다.

◆과나후아토의 전설

엘리타와 함께 가르시아를 찾던 베니가 나무 그늘 아래서 과거를 떠올리며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은 절대 안 갈 테야”라고 내뱉는다. 바텐더와 매춘부의 고단한 사랑. 그러자 엘리타는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라며 꿈꾸듯 과나후아토를 묘사한다. “그 아름다운 도시에 언젠가 함께 갈 수 있을까요?”

멕시코시티 북쪽으로 차를 달려 다섯 시간. 끝없이 이어진 터널 위에 도시 전체가 얹힌 듯한 과나후아토는 스페인풍 중세 도시의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베니와 함께 왔다면 엘리타는 어디를 찾았을까. ‘입맞춤의 골목’(Callejon del Beso)으로 향했다. 귀족의 딸을 사랑한 광부의 아들이 집안에 갇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건너편 주택에 세를 든 뒤, 밤마다 2층 테라스에서 만나 키스했다는 전설의 장소. 가뜩이나 좁은 골목길은 돌출한 두 집 때문에 끝에서 거의 맞붙을 듯 보였다. 테라스에 오른 연인들이 카메라를 향해 키스를 나눌 때마다 골목을 메운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한 번 더!”를 외쳤다. 전설 속 로맨스를 현실로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 구경꾼들은 그 사실을 알아챈 귀족이 딸을 죽인 후 지하실에 묻었다는 전설의 결말은 일부러 잊었다.

그러나 한 이야기의 정조(情調)는 결말이 결정하는 것. 언젠가 일요일에 결혼하자는 베니의 짧은 청혼 순간만이 스치듯 지나간 그들 삶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또 다른 현상금 사냥꾼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연인을 보며 베니는 오열한다. 둘은 끝내 도시 전체가 길 위에 놓인, 아름답지만 허망한 이 도시에 오지 못했다. 과나후아토를 그들 대신 방문했던 날은 두 사람이 놓쳐버린 그 많은 일요일 중의 하루였다.

◆테오티와칸의 저택

영화의 시작과 끝을 찍은 대저택 이름이 멕시코시티 북쪽 50㎞ 도시 테오티와칸 근처의 ‘하시엔다 산 후앙’이라고만 들었다. 쉽게 찾을 줄 알았지만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그런 이름의 저택은 없었다. 간신히 찾아낸 ‘산 후앙 틀라카테크판’은 맥주회사 회장의 별장이었다. 잘 가꾼 진입로 끝 철책 출입문에 도착해 매달린 종을 흔들었지만 한참 떨어진 거대한 저택 쪽에선 기척이 없었다. 30분을 기다려 경비원을 만난 후 관리 책임자와 통화까지 했지만 결국 사유지라 들어올 수 없다는 답만 들었다. 아쉬운 마음에 철책 사이로 손을 뻗어 사진만 거듭 찍었다.

베니는 천신만고 끝에 가르시아 머리를 자루에 담아 이 저택에 온다. 부호는 딸을 임신시킨 가르시아 머리에 현상금을 내걸었지만 그 사이 태어난 손자 재롱에 맘이 변했다. 부호는 이제 필요 없으니 현상금과 함께 가져가서 돼지에게나 주라고 한다. 16명 목숨을 앗아간 임무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분노한 베니는 그 부호를 살해한다.

진입로의 선인장 가로수 길은 저택을 빠져나오던 베니가 부호의 부하들이 난사하는 총에 맞아 죽어간 라스트신 무대였다. 베니를 떠올리며 진입로를 벗어날 때 바람이 불어 흙먼지를 일으켰다. 길 끝에서 웃옷을 벗은 소년들이 손을 흔들었다. 마주 흔들까 망설이는 사이에 차가 아이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가르시아’는 삶의 의미 없음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절망에 대한 영화였다.

◆◆◆

멕시코를 떠날 때 과나후아토의 미라 박물관에서 본 갓난아기 미라와 테오티와칸의 초대형 피라미드가 서로 겹치며 떠올랐다. 돌을 넘기지 못한 아기인데도 죽음의 표정은 강렬했다. 2000년 전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건설한 자들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었다. 베니의 운명은 모호했고 그를 향해 불을 뿜는 마지막 정지 화면 속 총구는 생생했다. 삶은 모호하고 죽음은 생생하다. 누군가의 울음이 다른 이에겐 소음으로 들리는 이 좁고 어두운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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