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자식이 잔병치레를 자주했던 탓에, 어머니는 자주 곰국을 끓였다. 몇 달 전부터 소 잡는 사람들을 찾아가 웃돈을 주고 고기를 구해오고, 몇 주를 종종거리며 제일 좋은 재료를 구해 곰국을 끓여냈다. 그렇게 끓인 뽀얀 국물 한 그릇이면 감기도 뚝 떨어지곤 했다. 서울에 와서 어머니랑 비슷한 맛을 내는 친구를 한 명 만났다. 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모든 부위를 조금씩 넣고 오래도록 푹 끓인 곰탕 맛으로 소문난 '동춘'이라는 식당을 하는 친구였다. 들깨가루를 듬뿍 얹은 그 곰국을 먹는데 코 끝이 시큰했다. 어머니가 해주던 바로 그 맛이었으니까.
■ 옛 맛 내는 법 곰국에는 설렁탕과 달리 뼈가 들어가지 않는다. 양지머리나 사태, 도가니와 함께 양, 곤자소니(창자 끝부분), 곱창 등 핏물을 뺀 내장을 빼서 함께 넣으면 더 걸진 맛을 낼 수 있다. 곱창의 누린내가 싫으면 부아(허파)를 더해줄 것. 큼직하게 썬 대파를 넉넉하게 넣어야 '캬' 소리 나는, 깊고도 시원한 맛이 살아난다.
고향이 인천이라서 그런가, 어머니는 김치를 담글 때 배추 반에 해물 반씩을 섞어 담그곤 했다. 대가리부터 박아 넣은 생태, 한 마리 통째로 들어간 낙지나 조기…. 그렇게 몇 개월을 독에 삭힌 김치와 해물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처음 결혼했을 땐 마누라의 김치가 입에 맞지 않아 혼도 났는데, 요즘은 우리 집사람도 생새우를 넣고 제법 근사하게 삭힌 김치를 담글 줄 안다. 파하핫…(웃음소리), 손맛은 역시 세월에서 나오는 건가 보다.
■ 옛 맛 내는 법 내장을 꺼내 짤막하게 토막 낸 생태는 먼저 소금에 설렁설렁 버무린 다음 고춧가루, 새우젓, 배즙, 잣, 그리고 밥 간 것을 넣어 조물조물 무친다. 김치를 통에 담을 땐 맨 위에 우거지를 덮어 꾹꾹 눌러준다. 하룻밤 지나 고기 육수에 새우젓을 섞어 살그머니 부어주면 김치에 시원한 맛이 더해진다.
전라남도 장성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덕에, 나는 아궁이 불로 끓인 음식을 먹고 자랐다. 요즘 사람들이 보기엔 퍽이나 '특별한' 음식인 게다. 어머니는 그저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무 이파리를 넉넉히 넣어 오래도록 끓여냈다. 하지만 건더기가 혀에 감기며 녹아 드는 구수한 맛이라니. 그 맛,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 옛 맛 내는 법 쌀뜨물은 두 번 헹군 물을 버리고 나오는 세 번째 물이 딱 좋다. 굵은 멸치와 마른 고추를 쌀뜨물에 넣어 끓이면 국물이 칼칼하고 시원해진다. 말린 시래기는 찬물에 넣어 끓이기 시작, 충분히 삶은 후 국에 넣을 것.
아버지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중국 북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수원에서 한 때 '부자' 소리 들으면서 컸던 양반치곤 입맛이 소탈해, 조기국을 제일 좋아했다. 조기와 무, 두부를 넉넉히 넣고 말갛게 끓인 조기국을 훌훌 드시며 아버지는 "아, 시원하다"는 감탄을 연발하곤 했다. 찬 바람 불 때면 이젠 나도 조기국 생각이 난다. 요즘엔 그 은근한 맛을 제대로 내는 식당을 보기가 힘들어 참 아쉽다.
■ 옛 맛 내는 법 조기는 청주를 뿌려 재운다. 멸치육수가 끓을 때 자른 조기를 넣어 끓이다가 한입 크기로 자른 투박한 손두부를 넣어준다. 소금보다는 조선간장이나 액젓으로 간해야 '제 맛'이 난다. 향긋한 미나리를 넣고 잠깐 더 끓이다가 쑥갓을 살짝 올려 마무리.
오징어볶음은 내게 프랑스에 계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자, 동시에 얼큰한 한국의 맛이다. 처음 한국에 와서 서울 신촌에서 오징어 볶음을 먹고 그 칼칼한 맛에 반해 버렸다.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어부보다 낚시를 잘하기로 소문 났던 우리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난, 오징어·문어 등을 마음껏 먹고 자랐다. 오징어볶음만 먹으면 그래서 아버지가 생각난다.
무대에 올라서기 전엔 꼭 해물탕으로 배를 채워야 든든하다. 공연 전엔 배달음식을 시켜서 대기실에서 대충 때우기 마련인데, 이 때 해물탕을 시켜 먹으면 후회가 없다. 멤버들과 대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숟가락 싸움 하며 뜨끈한 해물탕을 먹고 나면, 긴장도 풀리고 노래할 힘도 난다. 돌아오는 2월 29~3월 1일 서울 올림픽홀 앵콜 공연때도 해물탕으로 원기보충을 할 생각이다.
■ 옛 맛 내는 법 멸치 육수는 너무 진하지 않게 끓인다. 무, 양파, 꽃게, 모시조개 등 재료는 취향에 따라 넣되 낙지를 더하려면 맨 나중에 넣어야 질겨지지 않는다. 간은 소금으로 맞추고 시원한 바다 맛을 내려면 미더덕을 넣어줄 것.
지난 여름, 주인공이 요리사로 등장하는 '혀'라는 장편소설을 쓸 때의 일이다. 주인공이 마지막 만찬으로 준비하는 혀 요리 맛을 묘사하기 위해, 단골 레스토랑 주방장과 소 혀(牛舌)로 네 종류의 요리를 만들었다. 손님들이 다 돌아간 한밤의 레스토랑. 내 앞에는 네 종류의 소 혀 요리가 담긴 크고 흰 접시들이 놓였다. 평소에도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저 혓바닥 요릴 먹을 수 있을까? 나는 진한 적색을 띤, 스모키 향이 감도는 '로버트 몬다비 나파 밸리' 한 병을 주문했다. 이틀 동안 삶았지만 아직도 어금니 사이에서 질기게 씹히는 소 혀를 눈을 질끈 감고 삼키며 의지하듯 한 모금씩 와인을 마셨다. 금세 한 병이 바닥났다. 나는 뚜벅뚜벅 집으로 돌아와 여름내 붙들고 있던 장편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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