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조 대표는 코스닥 우회 상장을 위해 M&A시장에 매물로 나온 `굴뚝기업` B사를 인수했다. 우회상장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도 많았지만, 그는 회사의 한단계 도약을 위해 합리적인 경영 판단이라고 여겼다.
인수대상 B사는 40여년 전통을 가진 중견 기업. 그러나 중국산 저가 제품과 해외 명품에 밀려 업종 자체가 쇠퇴기로 접어들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조 대표는 이 기업이 현재 자금흐름은 나쁘지만 숨은 부실이 없고, 공장 입지여건이 좋다는 점 등 여러 측면을 좋게 보고 인수 후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인수를 마치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동반 부실이 우려된다`며 거래 은행들이 이전까지는 좋았던 A사의 신용평가 점수를 확 낮추고, 기존 대출마저 회수에 나선 것이다. B사와의 합병을 통해 코스닥에 등록하고, 부실을 정리한 후 대대적인 설비투자로 한단계 도약을 꿈꿨던 조 대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은행 '바이오 벤처에 자금 못줘'..자본시장서 돌파구
ㄱ은행에 20억원의 신용 대출이 있었는데 이전까지 단 한번도 원리금 연체가 없었음에도 불구, 은행은 대출을 회수하겠다며 자산 등의 처분을 요구해왔다. 또 합병 전 B사의 채권 280억여원을 보유하고 있던 ㄴ은행은 `제조업도 아닌 바이오 벤처에 대해 믿음을 갖고 기다리기 어렵다`며 한꺼번에 채권을 회수하겠다고 나섰다.
멀쩡하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부도 위기에 몰린 것이다. 조 대표는 "은행측은 `신용점수가 떨어지는 기업에 대해선 회수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였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 차원에서 인수를 결정했던 기업경영자 입장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였다"고 회상했다.
돌파구는 유상증자와 해외 전환사채(CB) 발행에서 마련됐다. 2004년과 2005년 몇 차례의 증자와 CB 발행을 통해 모두 340억원을 조달했다. 때마침 주식시장에 바이오 열풍이 일던 때라 성황리에 자금이 모였다.
은행에 질려버린 그는 대출금을 모두 갚았고, 2년여에 걸쳐 B사 정상화도 마무리지었다. 증자금으로 연구소와 제 2공장을 짓는 등 대대적인 설비투자도 실행, 올해 완공했다.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매출 증대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정작 부실해진 회사에는 돈을 떼 먹힐까 봐 부채 탕감도 해주고 이자율도 깎아 주면서, 멀쩡한 회사는 지레 자금을 회수해 가버려 없는 위기를 만든다"고 비판했다.
또 "이때 일을 겪으며 국내 은행들의 기업 신용 평가 시스템이 너무 주먹구구식이고 낙후돼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 은행, 외환위기 이후 기업 자금 `혈관` 역할 혼자선 못해
은행만이 산업생산의 `젖줄` 역할을 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이미 은행은 자금 중개 기능을 상당부분 직접금융시장에 내줬다. 삼성경제연구소 최호상 연구원의 `기업자금조달의 구조변화와 시사점`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기업들의 주된 자금줄은 직접금융시장이다.
1997년만 해도 국내 기업이 조달한 자금 중 은행 대출 등 간접금융을 통한 것이 37.3%, 채권이자 주식발행 등 직접금융이 36.7%로 비중이 비슷했다. 그러나 2005년에는 직접금융 비중이 44.2%로 간접금융 30.5%를 크게 앞지른 상태다. (위 표 참조)
은행의 금융 중개 기능이 약화된 것은 외환위기를 계기로 은행경영 환경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은 BIS자기자본 비율을 높여야 했고, 수익성 위주의 영업으로 선회하면서 이른바 '관계형 대출'을 크게 줄였다. 이에 따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이 줄어들었다.
또 한국 경제 성장의 차세대 엔진, 하이테크 산업에 대해서는 은행이 해 줄 역할은 제한돼 있다. 부침이 심하고 자산의 대부분이 무형의 기술력 등인 탓에 기존 은행의 신용평가 시스템으로는 대출을 내주기 어려운 구조다.
이 때문에 산업은행 등 일부 국책은행과 보증기금 등이 기술평가를 통한 자금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 그 규모나 평가역량이 제한돼 있어 충분한 공급자로 자리잡지 못했다.
또 일부 시중 은행은 대출과 자본투자를 섞어 리스크와 기대수익률을 모두 높이는 방식의 투자형 대출이나, 자회사로 사모펀드를 설립해 자본투자에 나서기도 하고 했다. 그러나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형편이다.
이와 관련, 한 시중은행 임원은 "시장 마인드가 강한 CEO가 한때 의욕적으로 자본 투자에 나서려고 했지만, 감독당국이 극도로 조심스러워 하는 등 걸림돌이 많아 지금은 흐지부지해진 상태"라며 "당분간 국내 은행들이 첨단산업 육성에 한몫을 하리라고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산업현장 지원에 대한 은행의 역할이 줄어드는 만큼 자금시장에 요구하는 몫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시장 역시 아직 제 몫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주식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액은 선진국이나 경쟁국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여전히 시장의 역할이 확대될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2005년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내 주식시장의 자금조달액은 1.4%에 그쳤다.
또 국내 증시의 자본화율(=시가총액/명목 GDP)도 91.2%로 비교 대상국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직 자본시장이 기업 자금공급 기능에 미흡하다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직접금융시장의 비중 증가가 긴 관점에서 보면 대세이기도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기업의 주식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 역시 주춤한 상태다.
대기업은 직접·간접시장을 막론하고 자금 조달 자체를 줄이는 추세다. 중소기업은 은행권에서 최근 1~2년 사이 대출영업의 돌파구로 중소기업을 지목해 전략적으로 집중하면서 간접금융의 의존도가 확대되고 있다. 낮은 신용도 등으로 회사채 발행이 부진한 가운데 주식 발행에 의한 자금조달 규모가 2000년 수준에 못미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증권사 총액인수 방식으로 증자를 실시해 100억원대의 자금을 조달한 방송통신관련 반도체칩 제조사 관계자는 "총액인수를 해줄 증권사를 찾아 유상증자를 성공적으로 마치기까지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았고, 업황이 매우 좋았는데도 조달이 만만치 않은 것을 보니 벤처 붐 이후 주식시장에서의 자금 조달이 상당히 위축돼 있는 것 같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의미이다.
* 협찬 : 대우증권, 미래에셋증권, 삼성증권, 한국투자증권, 현대증권, 증권선물거래소, 증권예탁결제원, 한국증권업협회, 자산운용협회 |
* 후원 :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 |
* 도움주신 분들 : 강창희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장, 김일선 자산운용협회 이사, 변진호 이화여대 경영학부 교수, 임종록 한국증권업협회 상무, 최창환 대우증권 전문위원 (가다나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