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이데일리 독자 여러분과의 만남을 기쁘게, 그리고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서울에서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다양한 금융상품이 거래되고 있지만, 요즘같은 장세라면 원/달러 거래만큼은 수수료가 채 빠지지 않는 재미없는 품목이 틀림없습니다.
작년 이맘 때가 생각나는군요. 2개월 가까이 환율이 일 중 3원도 움직이지 않고 심지어 8월 들어서는 1113원과 1114원의 1원 레인지 안에 갇혀서 옴싹달싹 못하던 환율에 질려 은행권 딜러들이 "업체 실수(實需) 거래만 체결하고 투기적 거래는 자제한다."는 결의(?)를 실천에 옮기면서 외환딜러들의 태업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던 시절... 그랬던 환율이 작년 8월 29일을 기점으로 아래로 흘러내려 9월 5일 1,103.60원의 연중 저점을 기록하고 방향을 위로 틀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고정환율제 하에서나 볼 수 있을 환율 움직임이 꽤 오래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작년 그 때를 방불케 하는군요.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까지 느낄 수 있는 철이 다가왔습니다. 이 시장이라는 곳이 마냥 온순한 양같이, 포식을 한 뒤 낮잠이나 즐기는 사자같이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고없이 닥치는 도둑같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이 시장의 추세(Trend)입니다. 지금은 뭔가 일어날 것 같은(뭔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까요?) 9월 장세를 대비하며 다시 한 번 시장을 점검해 볼 때인 것 같습니다.
◇지난 9개월간의 시장 움직임을 정리하자면
작년 11월 20일 이후 엔/달러 환율이 반 년 이상 지속해 왔던 105~110엔의 박스권을 상향돌파하여 금년 4월 2일 126.84의 연중고점까지 달러 급등세를 시현할 때까지가 이른바 펀더멘털(Fundamental) 장세, 혹은 추세장이라 할 수 있다. 극도로 악화되어 가던 일본 경제의 실상이 그 나라 통화인 엔화가치의 하락으로 반영되던 시점이며 엔화가 달러대비 약세를 보일만하다는 시장참여자들의 컨센서스가 이루어지던 때인 만큼 환율은 거침없는 오름세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논리는 원/달러 환율의 움직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면 지금은 무엇인가? 126엔대에서 놀던 환율이 118엔대까지 추락, 이후 다시 126엔대를 시도했다가 다시 119엔대로의 회귀... 그 사이에 그토록 일본 경제가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다시 좋아지기라도했다는 것인가? 아니다. 일국의 경제가 그렇게 조변석개(朝變夕改)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이른바 테크니컬(Technical) 장세, 혹은 조정장이라 하겠다. 고점이 확인된 이후 차익실현 및 추세반전을 노린 팔자 세력의 매물과 과거의 그 화려했던(?) 장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거나 언제나 뒷북치며 큰 손들의 밥이 되길 자처하는 세력들의 사자 물량이 부딪히며 그날그날의 뉴스와 시장 포지션 상황에 따라 하루는 오르면 다음날은 빠지는 그렇고 그런 재미없는 장세, 심하게 얘기하면 재수가 크게 작용하는 시절이 돼버린 것이다.
◇지금 시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런 조정장세에서는 시장은 그냥 올라도 보았다가 내려도 보았다가 하고 마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지금 엔/달러 시장을 비롯한 국제외환시장에서는 지난 6년간 독야청청 강세를 유지해 왔던 미국 달러화의 위상에 대한 논쟁과 가치평가 작업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금년 들어 일곱 차례에 걸친 금리인하를 통해 6.5%의 연방기금 금리가 3.5%까지 떨어지고(전통적 이론에서는 일국의 금리가 떨어지면 그 나라의 통화가치는 내려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GDP 성장률로 나타내는 생산성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는 데에다 무역수지 적자는 줄어들 줄 모르고, 증시가 여전히 하락 내지는 횡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의 통화, 달러라는 이름의 그 돈 값이 계속 강세를 유지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고 해서 "내 형편은 좀 낫다."라고 주장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일본의 통화가 달러화 대비 강세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마땅한가, 과연 유로화가 0.92의 저항선을 넘어서서 ‘1유로화는 1달러’라는 등식에 이르기까지 강세를 지속할만 한가 하는 점 등이 시장참여자들의 합의를 도출해 내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지금 모든 국가들은 자국통화의 평가절하를 유도해 수출을 늘려 불황을 타개해보겠다고 애쓰고 있다. 경제에서도 초강대국인 미국 또한 그러한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형편이다. 미국의 제조업체들이 단체로 부시 행정부에 대해 강한 달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고, 일본의 시오카와 재무상이나 구로다 재무관 같은 사람은 허구한 날 "최근의 엔화 강세는 경제 펀더멘털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시장에 잘 먹혀 들지도 않는 구두개입에 나서고 있다. 한국의 외환당국도 마찬가지다. 엔화를 비롯한 전 세계 통화가 달러대비 강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추세를 뒤쫓아가는 수준의 원화강세는 못 이기는 척 용인할 수 있으되 서울이 먼저 치고 나가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며, 그러한 인식 하에서 방어선을 구축한 레벨이 1280원(조금 융통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1275원 정도)이다.
특히 환율의 정체현상이 극심한 서울 외환시장의 경우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직간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외환당국의 개입(환율관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으로 인해 환율결정 메커니즘이 왜곡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필자는 지난 4월 6일 이후로는 오로지 "숏(달러매도초과)"이었다. 127엔 문턱과 1365원을 엔화와 원화환율의 꼭지였다고 가정하면(원/달러의 경우 1140원 돌파 이후 1365원까지 도달하는 기간 동안에 엘리어트 파동 이론에서 말하는 1-2-3-4-5의 상승추세를 이루는 다섯 개의 파동이 아주 그럴듯한 모습으로 파악이 되어진다) A-B-C로 이루어지는 조정파동이 형성되어야 할 터인데, 그 조정파동의 바닥이 어디인가, 어느 시점과 레벨에 이르러 달러는 다시 상승추세를 재개하게 될 것인가로 문제는 축약되는 것이다.
사실 120엔 근처에서 주춤거리는 엔/달러 환율이나 1280원 공방전을 몇 주 째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원/달러 환율이나, 차트를 중시하는 자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바가 아니다. 엘리어트(Elliott, Ralph N.)라는 사람이 70여년 전 오랜 기간의 실증적 연구를 통하여 나름대로 확립한 엘리어트 파동이론은 피보나치 수열(Fibonacci number sequence)에 입각한 중요한 비율들을(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이 38.2%, 50%, 61.8%) 발견해 내었고, 묘하게도 사람들은 주식시장이나 외환시장과 같이 어떤 상품의 가격을 가지고 트레이딩이라는 전쟁을 치를 때 기존의 추세에 대한 되돌림 수준(retracement level)을 위의 비율들에 따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명확히 설명될 수 없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거래행태는 그러한 경향을 보여 왔었고, 갈수록 엘리어트 파동이론에 대한 이해를 갖춘 사람들이 늘어 가면서 파동이론은 점점 더 그 위력을 더해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문제는 1280원이나 120엔이라는 레벨이 지난 연말연시의 달러 상승추세에 대한 38.2% 되돌림 수준 근처라는 점이다. 즉, 이 정도에서는 다시 매수세가 달라붙을 만한 레벨이라는 의미이며, 일본이나 한국의 외환당국이 결사적으로(?) 위 레벨을 사수하려고 드는 것도 일단 38.2% 되돌림 레벨이 밀려 버리고 나면 시장의 속성상 그 다음 타겟인 50%나 61.8% 수준까지는 환율이 쉽게 움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필자가 짚어 본 50%와 61.8%의 레벨은 원/달러의 경우 1255원, 1229원 언저리, 엔/달러의 경우 117엔, 114.50엔 근처가 된다)
◇그러면 향후 환율의 움직임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위 질문에 대하여 누군가가 정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시장은 붕괴된다. 모두가 사겠다고 나서거나 팔겠다고만 할 때, 거래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며 시장은 존립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답이 없는 이 세계에서 기업체는 기업체대로, 개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매수냐 매도냐의 의사결정을 내려야만 하고, 그러한 결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다들 그 나름대로의 분석과 전망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저 모두가 어렵다, 웬지 불안하다 하는 심리가 점차 시장에 확산되는 가운데 주가나 환율 등이 명쾌한 이론과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장세가 지속되고 있다 하겠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향후 외환과 관련한 의사결정을 어떤 식으로라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엇을 판단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필자는 특정 레벨의 붕괴나 돌파여부를 살펴 거래에 임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지금 원/달러나 엔/달러 환율은 참으로 어정쩡한 레벨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다. 위 차트에서 나타나듯이 1,280원과 120엔이라는 레벨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이 바닥을 다지고 있는 그림 같기도 하고 추가하락을 앞두고 숨고르기를 하고있는 그림 같기도 하다. R.S.I.(추세의 강도를 나타내는 지표 중의 하나로 Relative Strengh Index의 약자)도 두 통화 공히 40 근처에서 횡보하며 중립적인 양상을 띄고 있는데, 지금 시장이 그다지 달러과다매입(overbought)이나 달러과다매도(oversold) 상태도 아니어서 향후 어느 방향으로든지 움직일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러한 움직임 이후에는 이코노미스트들이나 기자들은 그 움직임에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으로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향후 엔/달러 환율이 119~120엔 레벨을 바닥으로 삼아 상승세를 재개한다면 서울에서는 다시 달러매수세가 역내외에서 강하게 유입되고 달러보유세력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 번 더 1300원 이상에서의 달러처분 기회를 노릴 것이고, 엔/달러 환율이 120엔의 하향돌파를 확실히 이루어 내며 달러약세 기조가 추세로 굳어지는 기미를 보이면 서울에서도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올 달러는 많다는 얘기다.
엔/달러의 경우는 아래쪽을 노리려면 일단 118엔의 하향돌파가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이틀 이상 뉴욕 종가가 118엔 아래에서 형성된다면 긴장할 필요가 있다. 위쪽으로는 우선 짚어지는 강력한 저항선이 122엔 정도이다. 여기를 넘어서야 125엔도 바라볼 수 있고 130엔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원/달러의 경우로 돌아오면 그 레벨은 1270원과 1293원 정도로 대치될 수 있겠다.
지루하고 답답한 외환시장에 어떤 모멘텀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인지 관심을 모았던 미국의 2/4분기 GDP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0.2% 성장에 그친 것으로 나타나며 이렇다 할 움직임이 간파되지 않고 있다. 태풍이 없는 바다에 적조현상이 나타나듯 움직이지 않는 환율로 인해 외환시장에서도 짜증과 조급증만 더해가는 적조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강대국들의 이해가 서로 엇갈리며 환율의 방향성에 대한 합의를 쉽게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시절... 사실 필자와 같은 외환딜러들이나 대박을 쫓는 투기꾼들에게나 출렁이는 시장이 매력적이겠지만 이 환율이라는 것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아래 위로 꿈틀거리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시장을 관찰하되, 머지 않은 시기에 정신없이 움직이는 장세가 도래할 것 같은 느낌은 강하게 든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진우 농협중앙회 외환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