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뿐인 평화'…우크라 사태 힘 못쓰는 유엔[미국은 지금]

법적 구속력 갖는 '안보리 결의안'
상임이사국 한 곳만 거부해도 막혀
러 규탄하려면 러 동의 받아야
미·영·프 vs 중·러 신냉전 구도 속
비토권 개혁 없인 '말뿐인 평화' 그쳐
  • 등록 2022-03-06 오후 2:36:57

    수정 2022-09-07 오후 9:30:58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미국 뉴욕시 맨해튼의 유엔 본부 정문 앞에 있는 랠프 번치 파크. 이곳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연일 크고 작은 시위가 열리고 있다.

지난 4일 오후 1시께(현지시간) 뉴욕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계 시민 3명이 유엔 쪽을 바라보면서 ‘우크라이나와 연대하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손 떼라’ ‘대량학살(제노사이드)을 멈추라’ ‘약속한 평화는 어디로 갔는가’ 등의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공원 내 큰 나무들에는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띠가 둘려 있었다. 이들은 “푸틴을 그냥 두면 그 무엇도 안전하지 않다”며 “유엔이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멕시코 방송사 ‘텔레비사’ 등 몇몇 해외 매체의 언론인들도 공원에서 취재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인 지난달 24일에는 맨해튼 센트럴파크 동쪽 67가에 있는 주유엔 러시아 대표부 앞이 떠들썩했다. 러시아의 침공이 현실화하자 수천명 규모의 시위대가 몰렸다고 뉴욕 데일리뉴스는 전했다. 우크라이나계뿐만 아니었다. 시위에 나선 러시아 출신 나타샤 보이코는 “큰 비극”이라며 “오랫동안 수치심을 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시 맨해튼의 유엔 본부 정문 앞에 위치한 랠프 번치 파크에서 시위대가 러시아를 규탄하고 있다. (사진=김정남 특파원)


우크라 전쟁에 힘 못쓰는 유엔

그러나 이들의 절규에도 유엔은 사실상 기능 마비 상태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겪으며 유엔은 수명을 다한 조직이라는 점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지난달 23일 밤 9시30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긴급 회의에서 세르히 키슬리차 유엔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는 “전쟁을 멈추는 것은 유엔의 책임”이라며 “가능한 모든 걸 할 것을 요구한다”고 각국에 호소했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아니다. 유엔 헌장 1조 1항은 △국제 평화·안전 유지 △침략 행위 진압 △국제 분쟁 조정·해결 등으로 설립 목적이 명시돼 있다. 전쟁이 나면 유엔은 이를 막을 의무가 있다.

하지만 유엔 헌장은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 안보리 회의가 열렸던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보란 듯이 전면 공습을 개시했다.이틀 뒤인 25일 오후 다시 열린 안보리 긴급 회의. 여기서는 유엔의 태생적인 약점이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 결의안을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비토권(거부권)으로 끝내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5개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자 핵 보유국이다. 이들 중 한 곳이라도 반대하면 안보리를 통과할 수 없다. 이를테면 안보리가 러시아를 쫓아내려 해도 러시아가 반대하면 못 한다는 것이다.

신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유엔의 무기력함이 극에 달하는 기류다. 상임이사국 내에서 이미 미국-영국-프랑스 진영과 중국-러시아 진영으로 양분화한 탓이다. 국제외교 분야의 한 석학은 “신냉전 체제가 굳어진다면 굳이 유엔이 필요한지에 대한 비판론은 거세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탄식했다. AFP통신은 “안보리는 유엔을 전쟁 났을 때 인도주의 지원을 하는 기구 정도로 격하시키고 있다”고 꼬집었다.

세르히 키슬리차 유엔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시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출처=유엔 웹TV 캡처)


신냉전 시대, 무용론 더 커질듯

그나마 지난 2일 유엔은 총회를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즉각 철군을 요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안보리 결의안과 달리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무려 141개국이 찬성한 만큼 러시아가 외교적으로 압박을 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유엔 주재 각국 외교관들은 결의안 통과 순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러나 러시아군 이튿날인 3일 유엔 결의안은 안중에도 없는 듯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에 있는 원전 단지를 포격했다. 이곳은 우크라이나가 가동하는 원자로 15기 중 6기가 있어, 만에 하나 폭격으로 파괴되면 방사능 유출 위험이 있는 곳이다. 4일 다시 긴급 소집된 안보리에서 바실리 네벤쟈 주유엔 러시아대사는 “(러시아의 원전 공격은) 거짓말”이라며 “러시아군이 통제하는 원전 인근에서 순찰 중 우크라이나 테러단체의 공격을 받아 대응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키슬리차 대사는 “거짓 선동을 멈추라”고 맹비난했다. 전쟁으로 사람이 죽어가는데, 유엔은 재탕 삼탕의 공방전만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케말 더비스 브루킹스연구소 부소장은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의 거부권은 세계 평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거부권을 없앨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유엔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유엔이 수명을 다했다는 비판론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모든 국제기구들이 강대국 입김에 움직이는 상황에서, 유엔 외에 기댈 곳이 없는 약속국도 많다. 당장 우크라이나에 이은 다음 타깃으로 꼽히는 몰도바와 조지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돼 있지 않다. 나토군이 두 나라 본토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푸틴 대통령이 이들을 공격해도, 지금의 유엔이라면 또 ‘말로만 평화’를 강조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지난 4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시 맨해튼의 유엔 본부 정문 앞에 위치한 랠프 번치 파크 내 큰 나무들에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띠가 둘러져 있다. (사진=김정남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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