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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은 후일로 기약하게 됐지만, 트럼프 2기 백악관 비서실장에 수지 와일스(67)가 임명되면서 미 정계의 높고 단단한 유리천장에 균열을 냈다.
백악관 비서실장은 정책과 인사에 깊숙하게 관여하는 대통령의 ‘오른팔’로 실세 중의 실세다. 다른 고위직과 달리 연방 상원의 인준 과정이 필요 없어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측근이 기용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와일스 인선에 대해 “백악관 비서실장에 임명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으며, 면접도 불필요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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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첫 여성 백악관 비서실장이라는 역사를 쓴 와일스는 40여 년간 선거 참모로 활동했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선 캠프 때 일정 담당자로 정치계에 첫 발을 들여놓은 와일스는 공화당 의원 보좌관, 지역 시장 자문역 등을 거쳐 2016년 트럼프 당선까지 경험했다. 2018년 별로 유명하지 않은 하원의원이었던 론 디샌티스가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듬해 디샌티스 주지사와 결별 후 2020년 대선부터 현재까지 트럼프 캠프의 최고 고문으로 활약했다.
이번 트럼프 캠프에서 선거대책본부장격인 총괄매니저로 정책·캠페인 메시지·예산·조직·유세 계획 등 모든 운영을 도맡으며 ‘브레인’으로 등극했다. 트럼프 캠프가 미 전역으로 유세를 다닐 때 타는 전용기에서 트럼프의 옆자리는 그의 몫이었다.
트럼프는 지난 6일 승리 연설에서도 와일스를 연단에 세워 “우리는 그녀를 ‘얼음 아가씨(ice baby)’라고 부른다”며 “수지는 뒤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뒤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고 확고한 신임을 표했다.
2020년 대선에서 좌절한 트럼프를 일으켜 세 번째 대선을 치르게 한 것도 와일스 영향이 컸다. WP에 따르면 트럼프는 2021년 1월 워싱턴을 떠나 남부 플로리다로 이주할 때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에 분노하며 보좌관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와일스는 이렇게 성난 상태의 트럼프와 두 번의 저녁 만찬 자리를 가졌는데 여기서 그를 설득해 정치적 복귀와 권력 재탈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트럼프의 거친 성향과는 대조적으로 와일스는 늘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해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지속해왔다. ‘얼음 아가씨’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거나 감정을 폭발시키는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고, 심지어 욕설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전해졌다. 트럼프 캠프의 지도부 대부분이 서로 다투기 일쑤인 남성들로 이루어진 상황 속에서 와일스는 그런 분위기와 차별화된 존재로, 주변의 존경을 받으며 캠프 내에서 자리 잡았다. WP는 “트럼프 주변의 인물 중에서도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고, 비판적인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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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스를 트럼프에 소개한 미국의 영향력 있는 로비스트인 브라이언 발라드는 “그는 겉으로 보면 할머니 같은 친근한 인상을 주지만, 내면은 강인하고 단단한 생존자”라며 “전쟁터에서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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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스는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 등을 고객으로 둔 거대 로비회사 ‘머큐리’의 지도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로비스트로도 활동했다. 40여 년에 이르는 정계 경력에서 약점을 뽑는다면 선거캠프 운영 쪽에 집중하느라, 정부 조직 운영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미 언론들은 와일스가 캠프에서 트럼프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게이트키퍼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이른바 ‘문고리 권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CNN에 따르면 와일스는 비서실장 수락 조건으로 트럼프에게 ‘누가 집무실에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지 자기가 통제하겠다’며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와일스는 캠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사진에서 늘 배경으로 있고, 언론에 실명으로 발언하는 적이 없으며, 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는 더 드문 성향을 보여 앞으로 백악관 비서실장이 돼서도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막후에서 핵심 실세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