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가 암 환자와 가족을 상담치료하고 있다신촌세브란스병원 제공 |
[조선일보 제공] 1 위암 2기 진단을 받고 위 3분의 1을 잘라낸 김미자(57)씨.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식사를 하지 못했다. 충분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상태인데도 “위가 없어졌는데 어떻게 먹나, 꽉 막혀 답답하고 아무것도 넘어가질 않는다”고 했다.
죽이라도 먹을 것을 권하는 가족들과 마찰도 생겼다. 매사에 주도적이고 철저한 성격이었던 김씨가 암에 걸려 받은 충격과 무력감이 빚은 결과임을 정신과 상담에서 알게 됐다.
식욕을 돋구고 잠을 잘 자게 도와주는 항우울제를 복용하면서 우울증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김씨는 가족들에게 “이것 먹고 싶다”, 의사에게 “저것 먹어도 되냐”고 먼저 물어볼 정도로 호전됐다.
미국암협회(ACS)는 암 환자의 정신적 고통을 ‘바이탈 사인(vital sign)’의 하나로 포함시킬 것을 권장하고 있다. 바이탈 사인이란 체온, 혈압, 맥박, 호흡 등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측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 암 환자가 겪는 정신적 고통 또한 암 치료의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뜻에서다.
암 환자들은 극심한 신체적 통증 외에 불면증, 불안감, 우울감 등과 같은 정신적·정서적 고통을 겪는다. 암 환자가 겪어야 할 ‘당연한 고통’이라고 지금껏 생각해 왔지만 ‘정신종양학’이란 이름의 현대의학은 이를 치료 대상으로 본다. 암의 예방, 진단, 치료, 재활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환자의 정신적·심리적 면 또한 정신과적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종양학의 역사는 20여년으로 길지 않지만 선진국 주요 암 센터에서는 이미 일환화된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으며, 국내서도 최근 국립암센터, 서울대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원자력병원 등에서 도입해 암 치료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정신과 함봉진 교수는 “암 환자 4명중 적어도 1명은 정신과 도움이 필요하다”며 “지난 2년 동안 정신과로 의뢰된 암 환자가 3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잠을 못 자던 환자가 숙면을 취하고, 식사만 제대로 할 수 있어도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고충을 크게 덜 수 있다는 것이 함 교수의 설명이다.
환자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적절한 배려와 격려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정신종양학의 역할이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암센터 정신과 전문의 강지인씨는 “환자 보호자들은 어떻게든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환자를 훈계하고 다그치는 경향이 있다”며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은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따뜻한 격려와 응원”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환자 가족에 대한 상담과 교육을 병행해 환자와 가족이 서로 이해하게 하고, 가족의 고충도 덜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암을 직접 치료하는 의사 입장에서도 정신과 협진의 도움은 상당히 크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암센터 라선영 교수는 “정신과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자료는 세부적인 치료 계획을 세우는 데 중요한 정보”라며 “환자 마음에 퍼진 암까지 돌봐주면 환자도 의료진을 더 신뢰하고 따르니 치료에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원자력병원 신경정신과 조성진 과장은 “앞으로 정신과 의사뿐만 아니라 심리학자, 사회복지사, 종교인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협력해 암 치료에서 일상 생활 복귀까지 체계적으로 돌봐주는 시스템이 만들어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