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것은 허공과 같아서, 햇볕이든 바람이든 구름이든, 혹은 지나가는 길손이든 무심으로 맞아준다.
무엇을 듣고 배우고 알려는 강박 없이, 그저 지나가는 바람인양 슬며시 다가갈 일이다.
절터 중에는 국보·보물급 문화재를 품고 있는 곳도 많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폐사지의 진정한 국보적 의미는 ‘텅 빈 공간’으로서의 위엄이 아닐까? 시간 앞에서 풍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 ‘땅, 물, 불, 바람’으로 돌아간다.
텅 빈 옛 절터에서 이러한 세계의 실상을 관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폐사지 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천년 저편에서 지금 여기로 이어지는 시간의 은하로 자맥질하여, ‘있는 그대로’ 우리네 삶을 성찰하는 것.
이 또한 폐사지 여행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학술적 가치보다는 자연적 배경이 빼어난 폐사지를 찾아봤다.
강원도 양양 '선림원터·진전사터·낙산사'
▲ 진전사지 삼층탑. (사진작가 박보하씨 제공) | |
미천골은 태고의 자연이 숨쉬는 우리나라 최고의 계곡 가운데 하나다. 미천골 국립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 옥빛 계곡 물 소리를 길잡이 삼아 800m쯤 걸어 오르면 산기슭에 바투 앉은 선림원터가 있다.
선림원은 804년 순응이라는 스님이 창건한 절인데 어느 날 큰물이 나서 흙더미에 묻혀 버렸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삼층석탑(보물 제444호), 지붕돌의 귀꽃이 약간 손상됐지만 연꽃 조각이 섬세한 석등(보물 제445호), 몸돌은 사라지고 돌거북과 용머리만 남아있는 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가 있다.
골 이름도 이 절에서 비롯됐다 한다. 한창 번성할 때 쌀뜨물이 계곡 하류까지 흘러내렸다 하여 미천골(米川谷)이 됐다는 것이다. 협소한 공간에 비해 너무 많은 대중이 살았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예나 지금이나 넘치는 건 병이다.
설악산 대청봉 동쪽 기슭 둔전골로 든다. 7번 국도를 타고 속초로 가다가 물치해수욕장 전 장산리에서 옛 속초비행장쪽으로 좌회전하여 곧장 가면, 길이 다하는 곳에 삼층석탑(국보 제122호) 하나가 솟아 있다. 단아하면서도 날렵하다. 8세기 후반에 조성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석탑 중 하나다.
진전사터에서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서 산기슭으로 오르면 돌계단이 부도(보물 제 439호)로 이끈다. 9세기 중반에 조성된 도의 국사의 부도로 추정하는데, 학자들은 이 부도를 한국석조형부도의 시원이라고 본다. 중국에서 선법(禪法)을 배우고 돌아온 도의 스님은 당시 교학과 염불 위주의 풍토를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육성은 ‘마귀의 말’이 되고 말았다. 이에 서라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은거한 곳이 진전사다.
고승의 유골을 모시는 부도는 석가모니의 유골을 모신 탑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도의 스님의 부도가 한국 최초의 부도라는 말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선종의 가르침이 이 땅에 뿌리내렸다는 선언적 의미를 띠게 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 인간 존엄의 절대성에 대한 가없는 긍정이다.
낙산사로 간다. 폐사지 여행길에 낙산사는 왜?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물론 낙산사는 폐사가 아니다. 하지만 지난 봄 불탄 자리에 새싹이 돋았다 시들고, 검게 그을린 나무 등걸 곁에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그 곁에 새로이 절집이 지어지는 현장에서 이번 여행을 마치고 싶었다. 낙산사는 전쟁터처럼 처참했고, 포연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웠다. 비장한 모순의 현장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바다를 배경으로 보면 한낱 봄꿈에 지나지 않는다.
●찾아가는 길(영동고속도로 이용) 현남IC → 양양 → 논화삼거리 → 56번 국도 구룡령 방향 15㎞지점에서 좌회전(선림원터) → 양양 방향 56번 국도 → 44번 국도 → 7번 국도 속초 방향 → 장산리에서 좌회전8㎞(진전사지) → 7번국도(낙산사)
강원도 강릉 '굴산사터·신복사터'
굴산사 가는 길은 충분한 실망 연습을 해야 한다. 낭만이 끼어들 여지는 더욱 없다. 논 가운데에 우뚝 선 당간지주를 보고 ‘폐허의 미학’ 운운하는 것도 억지스럽다.
통일신라 말, 서라벌은 시들어 가는 나무였다. 왕실은 왕위 쟁탈전에 골몰했고 지방에는 호족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때 이른바 구산선문으로 상징되는 산문선이 발흥한다. 굴산사도 그 중 하나였다. 사굴산문의 개산조인 범일 스님이 터를 닦았다.
범일 스님은 경문왕·헌강왕·진성왕 등이 국사로 모시고자 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높이 5.4m) 굴산사 당간(보물 제86호)은 권력과 타협하지 않은 기개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
논 가운데에 우뚝한 당간에는 툭툭 돌을 털어낸 정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정성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일체의 형식과 권위를 거부하는 선불교답지 않은가. 기술이 모자라서도 정성이 부족해서도 아닐 것이다. 간공(竿孔)의 정교함이 그것을 말해 준다.
신복사터 굴산사에서 왔던 길을 되짚어 나와 강릉시내쪽으로 가다가 강릉보건소를 지나 오른쪽으로 약 500m 들어가면 구릉 같은 산기슭에 신복사터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 어떤 사람도 무장해제시킬 것 같은 미소를 머금은 석조 보살상(보물 제84호)과 삼층석탑(보물 제87호)을 만난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오랜 세월을 노천에서 보낸 신복사터 공양상은 상처가 많다. 코는 많이 부서졌는데, 석불의 코를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당한 수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미신이라고도 야만적 행동이라고도 말할 자신이 없다. 오랜 세월 인고의 나날을 보낸 이 땅 어머니들 얼굴이 겹치기 때문이다. 입술도 깨어져 마치 이가 다 빠진 할머니가 웃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보살상의 얼굴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모습 그대로도 좋다. 최첨단 기술로 감쪽같이 복원을 한다고 해도 결사반대하고 싶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 그것이 폐사지가 오늘에 해야 할 역사적 구실이 아닐까.
●찾아가는 길(영동고속도로 이용) 강릉IC → 관동대 정문 → 구정면 학산리(굴산사지) → 강릉시내방향 → 강릉보건소 지나 장애인서비스센터 끼고 우회전 500m(신복사지)
충북 충주 '미륵사터 하늘재'
▲ 미륵사지 오층탑.(사진작가 박보하씨 제공) | |
3차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다가 몽골의 침입으로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절 이름은 미륵대원이었다. 현재 절터(사적317호)에는 석불입상(보물 제96호)와 석등(충북도 문화재 제19호), 오층석탑(보물 제95호) 등의 유물이 남아있다. 미륵은 석가모니부처 입멸 후 56억 7000만 년에 세상에 나타난다는 부처다. 어느 시대건 사람들은 현실의 고통이 클수록 메시아를 갈구한다. 불경스런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사회엔 강남 아파트가 그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미륵사터에서 1.5㎞ 정도 호젓한 숲길을 오르면 그곳이 하늘재다. 그리고 그 고개 너머 마을이 관음리다. 관음(觀音)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내면으로 되돌려 성찰하라는 얘기일 것이다. 허황된 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메시아는 결코 우리에게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스산한 계절이다.
●찾아가는 길(중부고속도로 이용) 일죽IC 충주 수안보 597지방도 미륵사터 (영동고속도로 이용) 이천IC 장호원 충주 수안보 597지방도 미륵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