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갈라 놓는 사회…‘乙의 싸움’ 시작 됐다

"밥 못 먹는데 식대 내야"…예비부부-결혼식장간 대립
택배대리점주 극단적 선택…"원청이 을·을 싸움 만들어"
새로운 계급 된 재난지원금, 수령여부 관계없이 '불편'
  • 등록 2021-09-12 오후 4:50:10

    수정 2021-09-12 오후 9:15:12

[이데일리 이소현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2년 가까이 지속하면서 ‘을(乙)의 싸움’이 심화하고 있다. 이념·지역·계층·세대·젠더(성) 간 갈등이 뿌리 깊은 ‘갈등 공화국’인 우리 사회의 갈등 양상이 갑을 관계를 넘어 을과 을의 갈등으로 번져 골이 깊어지는 모양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하객 줄어도 식대는 내야”…뿔난 예비 신혼부부들

“곧 단속 나오거든요. 홀 밖에 계신 분들도 나가주셔야 합니다.”

지난 11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한 예식장. 결혼식을 앞두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하객들을 웨딩홀 관계자가 밖으로 내보냈다. 발열체크와 QR 인증까지 마쳤지만,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이 초과돼 하객들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날 결혼식은 별도의 피로연 없이 끝나 하객들은 와인 2병을 답례품으로 받았다. 지난 3일부터 변경된 방역 지침에 따라 참석 가능 인원을 49명에서 99명으로 늘리는 대신 식사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달 3일 예식장 방역지침이 바뀌었지만 코로나19 이후 이어진 식장과 예비부부 간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정부가 공연장 등 다른 시설과 달리 결혼식에 유독 가혹한 방역지침을 적용하고, 예식장에는 특수 상황인 만큼 인원을 줄여 재계약해 줄 것을 ‘권고’하는 수준에 그쳐 을의 싸움을 방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피해는 고스란히 예비 신혼부부의 몫이다. 예식장이 요구하는 최소 보증 인원은 보통 200~300명대인데 참석자 규모나 식사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인원만큼의 식대를 예식장에 내야 한다. 이어 예식장 측에서 판매하는 답례품도 강제구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보증 인원을 줄여주는 대신 식대나 답례품 비용을 2~3배씩 올리는 곳도 있다.

내달 2일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 A씨(34)는 “최소 보증 인원 250명으로 계약했는데 예식장 측은 이미 계약서에 서명했으니 식대를 환불해 줄 수 없다고 한다”며 “답례품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2만원도 채 안 되는 홍삼이나 와인을 5만원 정도에 구매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예식업계는 경영난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예식장 관계자는 “임대료나 인건비, 공과금 부담까지 고정비 지출은 여전해 우리도 힘들다”고 말했다.

예비부부들의 피해가 늘어나자 지난 9일 ‘전국신혼부부연합회’는 정부서울청사 앞에 정부 방역지침을 항의하는 글귀를 붙인 근조 화환 시위를 했다. 1인 시위와 래핑 버스 시위도 벌어졌다. 연합회 측은 “앞으로도 예식장 관련 방역 지침이 바뀔 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항의하겠다”고 밝혔다.

9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전국신혼부부연합회 회원들이 정부의 결혼식 방역 지침 개선을 요구하며 화환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택배대리점주 극단 선택…을·을 갈등으로

코로나19 장기화로 우리 사회 필수산업이 된 택배업계에서는 을의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최근 경기 김포에서 CJ대한통운 택배대리점을 운영하던 40대 점주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유서에는 민주노총 산하 전국택배노조 소속 직원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는 내용이 담아 있었다.

이후 택배노조와 대리점주들은 폭로전을 이어가며 책임공방을 벌이고 있다. ‘코로나 특수’로 원청인 택배사는 매출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하청인 대리점과 택배기사 등 택배 현장의 ‘을’들은 서로 물어뜯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노조 측은 대리점주의 열악한 경제 상황을 외면한 택배사 측에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입장이다. 택배노조는 지난달 31일 “원청은 약관을 위반하면서까지 물품 배송을 계약하고 노조가 시정을 요청하면 책임을 대리점에 전가하며 을과 을의 싸움으로 만들어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청인 CJ대한통운은 수수료를 포함한 이번 사안의 쟁점들은 대리점과 택배노조의 갈등이라며 선을 그었다.

추석 연휴를 약 2주 앞둔 3일 오전 서울 송파구 동남권물류단지에서 관계자들이 택배 물류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재난지원금, 새로운 ‘계급’…받아도, 못 받아도 ‘불편’

재난지원금도 새로운 빈부 차이로 등장, 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번 재난지원금 지급 기준을 ‘소득 상위 12%’와 ‘소득 하위 88%’로 나누면서 사회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령 여부와 관계없이 불쾌감이나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연구원 이모(35)씨는 “집도 차도 없는데 지원금을 못 받았다”며 “지원금 못 받았다고하면 ‘자랑하냐’고 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한다”고 말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박모(37)씨는 “동창들 단체 카톡방에서 몇 명이 ‘못 받았다’고 하니 ‘나보다 잘 벌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위화감이 들더라”며 “재난지원금 수령에 따라 괜히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SNS에는 지원금 대상자가 아니라는 ‘탈락 인증’ 사진에 당사자는 불만이라는 한편 ‘신종 자랑’ 등이라는 댓글이 달린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인 하위 88%는 평민 등으로 칭하는 ‘재난지원금 계급표’도 등장해 씁쓸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재난 속에서 납득할 만한 지침이나 대책의 부재로 피로도가 극에 달하자 을과 을의 싸움이 심해지는 것”이라며 “특히 재난지원금을 둘러싼 잡음은 또 하나의 편 가르기, 양극화, 분열이 발생하는 현상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전 국민의 약 88%가 1인당 25만원씩 받는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재난지원금) 지급 절차가 시작된 6일 서울 마포구 재래시장의 한 가게에 긴급재난지원금 사용 가능 안내 문구가 붙어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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