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라는 적대적 공생관계에 똬리를 튼 거대 여야 정당구조에서 진보적 의제를 화두로 소금 역할을 하는 작지만 강한 정당이다. 매우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낡은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위헌 정당이다. 차라리 북한으로 가라는 거친 비아냥거림이 대표적입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현실을 도외시한 채 허황된 이상에만 매달려있는 철부지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차기 대선이 불과 1년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여야 정치권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진보정당의 움직임입니다. 유독 조용합니다. 20대 총선에서 제3당인 국민의당 돌풍에 밀려서 존재감이 약해졌다고 해도 이건 아닙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보정당은 대선후보도 내지 못하거나 누가 나오더라도 야권단일화의 변수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진보정당 없는 차기 대선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요?
◇진보정당, 민노당 ‘기적 신화’에서 통진당 몰락까지
진보정당의 원내 진입은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지만 전쟁과 분단이라는 오랜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린 한국사회에서는 쉽지 않았습니다. 총선에서 국회의원 배출은 언강생심이었습니다. 꿈이 이뤄진 것은 2004년 17대 총선입니다. 97년 대선에서 권영길 주도로 국민승리 21을 창당한 지 꼭 7년만입니다.
화려한 시작만큼이나 민노당의 의정활동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노동, 환경, 농민, 인권, 탈핵 등 진보적 의제로 여의도의 낡은 프레임을 바꾼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좌충우돌도 없지 않았습니다. 민노당은 보수정당과 우리 사회의 기득권 구조와 싸우면서도 참여정부를 향한 날선 비판을 쏟아내며 선명성 경쟁에 치중했던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 비판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부의 역량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한 전략적 착오라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탈핵을 외치면서도 북한의 핵실험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모순도 보여줍니다. 이후 2007년 대선패배 책임론과 북한문제를 둘러싼 노선투쟁으로 민노당과 진보신당으로 갈라섭니다. 진보정당의 전성기를 막을 내리고 맙니다.
분당 이후 수준은 처참합니다. 18대 총선에서 민노당은 5석을 얻고 진보신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합니다. 당시 민노당의 비례대표 정당득표율은 5.68%, 진보신당은 2.94%에 불과했습니다. 부활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이뤄집니다. 민노당, 진보신당 탈당파, 국민참여당의 통합으로 단일대오를 이룬 통합진보당은 민주통합당과의 강고한 야권연대를 발판으로 지역구 7석, 비례대표 6석 등 총 13석을 거둡니다. 목표였던 20석 교섭단체구성에는 실패했지만 나쁘지 않은 성적표였습니다. 그러나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격언대로 총선 이후 곧 자멸의 길로 접어듭니다. 비례대표 경선부정 사건과 중앙위 폭력사태를 겪으면 분당됩니다. 통합진보당은 이후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을 겪으며 2014년 12월 해산됩니다. 현존하는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은 정의당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소선거구제 딜레마’ 정의당, 실제 의석수와 지지율의 괴리 여전
총선 이후에도 진보정당은 국민은 물론 언론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3당이라는 이름에 묶여서 뉴스의 한모퉁이를 차지하는 정도입니다. 언론운동가 출신의 추혜선 의원이 미방위가 아니라 외통위로 배정받은 현실은 정의당의 초라한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말이 안되는 상임위 배정이지만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원내교섭단체도 아닌 제4당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20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의 성적표가 과연 합당할까요. 국회의원 정수 300명을 지역구가 없다고 전제하고 7.23%라는 정당 지지율로 단순 환산하면 22명입니다. 교섭단체를 넘어서는 수준입니다.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이 정당명부비례대표 선거개혁을 촉구하면서 낸 보도자료를 보면 더 재미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20대 총선 결과를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도(지역구 253 vs 비례대표 127로 계산) 도입을 전제로 환산하면 새누리당 120, 더민주 132, 국민의당 95, 정의당 22, 무소속 11석입니다. 새누리당과 더민주 의석은 큰 변동이 없어나 소폭 늘어나는 반면 국민의당과 정의당은 상대적으로 의석수 증가폭이 더 보입니다.
정의당은 상대적으로 소선거구제의 피해자입니다.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이나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가장 수혜를 입을 수 있는 정당입니다. 여야의 선거구 획정 과정에서 정의당이 비례대표제 축소에 강력 반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차이…실개천 vs 큰 강물
진보정당은 매번 독자성을 강조해왔습니다. 과거 실패로 돌아갔던 열린우리당과 민노당과의 소연정 논의가 대표적이었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구제 개편을 명분으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주장했지만 불발로 끝나면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지만 민노당의 거부했습니다. 양당의 정체성과 이념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논리입니다. 실개천은 가볍게 건널 수 있지만 큰 강물을 건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민주과 국민의당은 사실 차기 대선주자와 지역기반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정책적 차이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정의당 역시 ‘진보정당’이라는 레토릭만 남아있을 뿐 두 정당과 크게 차이도 없어 보입니다. 19대 국회 말 새누리당이 노동개혁 4법 처리를 강조할 때 야3당은 모두 반대했습니다. 새누리당의 테러방지법 강행처리에는 힙을 합쳐 필리버스터로 맞섰습니다. 20대 국회에서 박승춘 보훈처장 해임촉구결의안, 재벌개혁 의제, 청와대 서별관회의 청문회 추진, 세월호 특조위 기한 연장, 국정교과서 폐지법안 공조 등 굵직굵직한 이슈에 비슷한 시각을 드러냈습니다. 뭐가 다른가요? 이 정도면 합당을 해도 크게 다르지 않나요? 결국 진보정당은 기존 보수야당과의 차별화에 실패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진보정당의 끝없는 딜레마, 독자노선이냐 후보단일화 협력이냐
20대 총선 이후 존재감이 약해진 정의당의 입장에서 차기 대선은 큰 고민입니다.
독자노선을 고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세울 인물도 마땅치 않습니다. 정의당의 간판은 여전히 심상정, 노회찬입니다. 2004년 17대 총선 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새누리당과 더민주의 경우 지도부가 수없이 바뀌고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대목입니다. 진보정당은 세대교체에 실패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차기 대선에서 독자노선을 고수했다가 박빙의 승부로 정권교체가 불발되면 너무나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vs 한명숙의 초박빙 승부가 오세훈의 승리로 끝나면서 노회찬이 맹비난을 받았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후보단일화 카드를 꺼내들 수도 없습니다. 진보정당의 존재 의의 자체가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환경, 노동, 인권을 최우선적 가치로 생각하는 진보적 성향의 지지층이 존재합나다. 독자노선 포기는 존재의 부정일 뿐만 아니라 오래 시간 어려운 환경에서도 진보의 가치에 손을 들어준 지지층을 버리는 것입니다.
독자노선이든 단일화든 진보정당의 선택은 쉽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대로 가다가는 진보정당이 유명무실한 정당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헬조선 흙수저’의 나라로 변신하는 대한민국 사회는 이역만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복지모델을 부러워합니다. 진보정당이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가지 색깔로 만들어진 무지개에서 하나의 색깔이라도 빠지면 무지개는 무지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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