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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연기라는 한 우물을 26년 가까이 팠다. 그런데 “나는 타고난 광대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연극계에서는 중견의 위치지만 아직도 자신의 실력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다. 연극 ‘대학살의 신’(2월 16일~3월 24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으로 1년여 만에 무대에 다시 서는 배우 이지하(49)의 이야기다.
프랑스 작가 야스미나 레자가 쓴 ‘대학살의 신’은 난장판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연극이다. 놀이터에서 다툰 두 아이의 부모가 문제 해결을 위해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시작은 우아하지만 끝은 걷잡을 수 없는 소동으로 치닫는다. 교양과 예절이라는 가식으로 포장하고 있는 중산층의 민낯을 까발리는 블랙 코미디다. 국내에서는 공연제작사 신시컴퍼니가 2010년 초연한 이후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다.
이지하는 2017년 처음 이 연극에 출연했다. 관객 입장에서는 심각한 고민 없이 웃으며 보면 되지만 배우로서는 연기에 있어 강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작업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난 이지하는 “폭죽처럼 터지는 에너지가 필요한 작품이었다”며 “한 번 공연하고 나면 거의 탈진 상태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럼에도 2년 만에 다시 돌아오는 ‘대학살의 신’에 출연을 결심한 것은 바로 2017년 공연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남경주·최정원·송일국이 함께 출연하기 때문이다. 공연계도 이들 4명의 배우들이 다시 보여줄 연기 호흡에 기대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지하는 “‘대학살의 신’은 배우들끼리 유기적으로 잘 움직여야 제대로 굴러간다”며 “한 번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이라 이번에도 안정감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웃음과 함께 주제를 보다 깊이 있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네 명이 벌이는 소동을 통해 관객이 웃음 속에서 각자 나름의 고민을 안고 가길 바란다. 이지하는 “초연 때는 어떻게든 재미있게 해보려고 했다면 이번에는 작품의 재미와 함께 보다 인물을 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서 관객들이 우리 공연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비춰볼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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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고향인 이지하는 어릴 적부터 연극·뮤지컬을 보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스스로 배우의 끼를 타고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냉정한 성격으로 부족한 부분을 끊임없이 채우기 위해 노력을 거듭해왔다.
지난해 연극계 ‘미투’ 운동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에 무대를 한 동안 떠나있기도 했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대학살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지하는 “문화예술을 즐기고 싶은 관객의 욕구나 기호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웰메이드 작품은 말로 하는 건 평범하지만 정작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며 “그런 점에서 ‘대학살의 신’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웰메이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타고난 광대가 아님에도 26년간 연기라는 한 우물만 팔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이지하는 책임감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대신 배우로서의 현실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지하는 “배우로서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믿음을 느낀다”며 “오늘을 기반으로 내일을 생각하고 현실을 착각하지 않는 배우가 되기 위해 지금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 늘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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