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 연준 의장은 13일(현지시간) 런던 정경대(LSE) 연설을 통해 올해 첫 공식 발언에 나섰다.
버냉키 의장은 이 자리에서 차기 정부가 아무리 막대한 재정정책을 구사한다고 할 지라도 홀로 위기를 진화할 수 없다면서 "더 많은 자본 투입과 보증으로 신용 시장의 안정성과 정상화를 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나라에서 공적자금이 금융 시스템에 투입되는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러나 이같은 처방이 호소력이 없을 수 있지만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금융권 부실의 뿌리를 뽑는 것이 급선무란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며, 차기 정부가 감세 등 재정정책에만 무게를 두어선 안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 것이기도 하다.
◇ 부실 해소 갈길 먼 美 금융권
신용 시장이 경색되면서 금융권은 이런 막대한 규모의 자산을 유동화시키지 못한 채 떠안고 있는 것이다. 일부는 헐값 매각에 나서보려고 하지만 매기 자체가 없다. 투자은행들은 이 ABS를 기반으로 파생시킨 자산담보부증권(CDO)를 만들어 팔았고, 부실 규모는 그만큼 더 커졌다.
베어스턴스, 리먼브러더스 등 월가 투자은행들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자산 상각 부담을 안고 있는 금융권의 줄도산을 우려, 정부는 지난해 10월 7000억달러 규모의 부실자산구제계획(TARP)를 내놨다.
현재 1차분은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그룹(AIG)와 씨티그룹 등 금융권에 집행됐으며, 민주당 일부에선 이를 주택차압(foreclosure) 방지 등에도 전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당선자는 전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통해 의회에 TARP 잔여분 3500억달러 집행을 공식 요청했다.
◇ "재정정책만으론 경기 못살려"..세가지 금융부실 제거방안
버냉키 의장이 제시한 금융 시스템 부실 제거 방법은 크게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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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식은 씨티그룹의 지원에 쓰였다. 정부는 씨티의 부실자산 50억달러에 대한 보증을 해주기로 하면서, 이 자산보증프로그램(AGP)은 다른 금융사에도 지원될 수 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 美, 씨티式 부실자산 보증 확대한다
세 번째는 은행 부실자산 매입과 처리를 전담하는 이른바 배드뱅크(Bad bank)를 설립하는 것이다.
버냉키 의장은 "배드뱅크의 현금과 주식을 금융기관의 자산과 맞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정부의 상당한 재정이 금융 산업에 투입되는 것에 대한 위험성은 공존하지만 현재의 위기에선 이런 움직임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타바콜리 스트럭처드 파이낸스의 자넷 타바콜리 대표는 "버냉키 의장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쁜 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며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의 투자은행이 없다. 전체적인 상황은 너무 박약하다"고 말했다.
버냉키 의장은 TARP 자금의 주택차압 방지 전용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이같은 주택차압 방지 노력은 주택시장을 강화시킬 것이고, 모기지 손실을 줄여 금융 안정성도 높일 수 있다"고 밝혔다.
◇ "연준, 많은 수단 갖고 있다"
연준은 이미 정책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내렸으며, 비전통적 방식을 통해 직접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책을 전개하고 있다.
버냉키 의장은 이날 연설에서도 "연준은 경제 성장과 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갖고 있다"면서 "연준 재무제표 자산 측면을 활용해 이를 구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준은 기업어음(CP)과 모기지증권(MBS) 매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출해 금융 시스템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으며, 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시장에서 국채를 직접 매입하는 방식으로 통화량을 공급할 방침이다. 버냉키 의장은 이날 이 같은 방침도 확인했다.
그러나 유동성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이 돈을 풀지 않고 갖고 있거나 오히려 중앙은행에 예치하고 있는 점은 문제가 되고 있다.
연준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연준에 예치된 지불준비금은 7980억달러로 4개월 전인 8월말의 20억달러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했다. 연준이 초과 지불준비금에 대해 이자를 지급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미국의 지난 해 12월 M0 증가율이 M1 증가율을 밑돌아,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공급하면 통화가 승수(money multiplier)에 의해 추가 공급분 이상 늘어난다는 이론을 비껴났으며, 이것은 은행들이 다시 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관련기사 ☞ 美 자금시장 `해빙조짐 보이나'
버냉키 의장은 이와 관련, "신용 시장 상황이 완화되고 은행들이 새로운 제도에 좀 더 편안하게 접근하게 된다면 통화 정책도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언급했다.
한편 버냉키 의장은 `양적 완화` 대신 `신용 완화(credit easing)`란 표현으로 대신해 주목을 끌었다. 현재 연준의 행보는 지난 2001~2006년 일본은행(BOJ)이 전개했던 것과의 차별화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두 경제 상황도 다르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