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 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도시빈민의 삶을 통해 경제 성장의 그늘에 대한 아픔을 그려 냈던 문제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의 저자 조세희 작가가 25일 오후 7시쯤 크리스마스에 숨졌다. 향년 80세.
장남인 조중협 도서출판 이성과힘 대표는 “조세희 작가가 지병으로 강동경희대병원에서 타계했다. 올 3월 말 코로나19에 걸린 이후 의식이 없으셨고,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떠나셨다”고 말했다.
| 이 시대의 힘없는 약자를 상징하는 ‘난장이 연작’을 써낸 조세희 작가의 생전 모습(사진=연합뉴스). |
|
고인은 이제 하나의 고전(古典)이 된 ‘난장이 연작’을 써낸 주인공이다. ‘난쏘공’ 출간 이후 ‘난장이’는 이 시대의 힘없는 약자를 나타내는 ‘상징어’가 됐다.
1942년 경기 가평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보성고와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를 다녔고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돛대 없는 장선’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했으나, 10년 동안 소설 작품을 쓰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1975년 ‘문학사상’에 난장이 연작의 첫 작품인 ‘칼날’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난장이 연작 12편을 모아서 1978년 완성한 소설이 그의 대표작 ‘난쏘공’이다. ‘뫼비우스의 띠’,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등 단편 12편을 묶어 문학과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난장이’는 이 시대의 힘없는 약자를 나타내는 상징어였다.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 무허가 주택(판자촌)에 사는 난장이 가족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도시빈민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냉혹한 현실을 극적으로 그려내며 문제작으로 주목받았다. 1970년대 들어 본격화한 빈부격차와 도농격차, 노사 갈등 등의 사회적 모순을 첨예하게 다뤄 당시 대학생들의 필독서로도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은 1978년 6월 초판 1쇄를 찍은 이후 2017년 4월까지 300쇄를 찍었다. 당시 누적 발행 부수는 137만 부에 달했다. 순수 문학 작품으로는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2000년대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는 등 작품은 현재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올해 7월까지 320쇄를 돌파해 누적 발행 부수가 약 148만 부에 이른다.
고인은 2002년 이 작품에 대해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들과 식사를 하는 동안 철거반들이 대문과 시멘트 담을 부수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싸우다 돌아오면서 한동안 포기했던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면서 “유신정권의 피 말리는 억압 독재가 없었다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난쏘공’이 100쇄를 찍었던 1996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한 작품이 100쇄를 돌파했다는 것은 작가에겐 큰 기쁨이지만 더 이상 ‘난쏘공’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판을 펴낸 2000년 ‘작가의 말’을 통해서는 “나의 이 ‘난장이 연작’은 발간 뒤 몇 번의 위기를 맞았었지만 내가 처음 다짐했던 대로 ‘죽지 않고’ 살아 독자들에게 전해졌다”고 쓴 바 있다. 당시 이 글에서 고인은 “이 작품은 그동안 이어져 온 독자들에 의해 완성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 점만 생각하면 나는 행복한 ‘작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나는 아직도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며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삼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라고 썼다.
고인의 다른 작품으로는 소설집 ‘시간여행’(1983), 사진 산문집 ‘침묵의 뿌리’(1985), ‘하얀 저고리’(미출간) 등이 있다. 1991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하얀 저고리’를 잡지에 연재했지만 연재 이후 책으로 내지 않아 미완의 작품으로 남겼다. 이후 고인은 새로운 소설을 쓰는 대신 1997년 사회 비평지 ‘당대비평’ 편집인을 맡기도 했다. 또 카메라를 들고 노동자와 농민 등의 집회 현장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했으나, 말년에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고인의 빈소는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 12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8일이다. 유족으로는 아내 최영애씨와 두 아들 조중협·조중헌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