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in | 이 기사는 11월 03일 11시 08분 프리미엄 Market & Company 정보서비스 `마켓in`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
작년 각종 자본유출입 규제가 도입되면서 국내 채권시장이 점점 내성을 갖춰가고 있다지만 국제적으로 늘어난 유동성을 발판으로 외국인 투자자들도 국내 채권시장에서 차근차근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추세다. 특히 과거보다 특정 펀드나 국가의 입김이 세지고 있다는 점이 최근 외국인 원화채권 투자에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시장참가자들도 투자 규모 자체가 늘어나는 것보다 특정 주체에 의한 시장 쏠림을 우려하고 있다.
“외국인 빠져나가나”…불안한 시장
9월 들어 그리스 디폴트(채무불이행)는 수순일 뿐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고개를 들자 국고채 3년물 금리는 3.30%까지 밀렸다. 7일짜리 환매조건부채권(RP) 금리인 기준금리와 3년짜리 국채의 금리차가 불과 25bp에 그쳤다. 하지만 9월 중순에 접어들자 채권 값 상승세에도 제동이 걸렸다. 올해 한때 1050원을 밑돌던 달러-원 환율이 당국의 잇따른 경고성 발언에도 불구하고 역외세력의 달러 집중 매수에 1200원대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채권시장에서도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환손실을 입어 국내 채권시장을 이탈하거나 대외 불확실성 확대로 국내 채권이 더 이상 안전자산이 아닌 `이머징 위험자산`으로 분류되면 투자자금 유입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였다. 지난 2008년 나타났던 글로벌 자금 회수 현상이 재현될 수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마저 나왔다.
9월 말에 국내 국채를 대거 보유하고 있는 미국 투자회사 프랭클린템플턴이 일부 채권 종목을 처분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매도설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국채 값은 속락했고 한동안 시장은 외국인의 움직임에 우왕좌왕하는 장세가 펼쳐졌다. 금융당국은 연일 “한국 채권시장은 괜찮다”며 불안감을 진정시키는데 바빴다.
10월 들어 그리스 디폴트를 막기 위한 국제 공조가 가시화되고, 위기 학습효과로 외환시장 변동성이 한풀 꺾이자 채권시장도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유럽발 재정위기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다는 인식에 시장은 쉽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금융위기 때보다 채권 자금 유출이 확연히 줄긴 했지만 은행권 전염 가능성에 유럽계 자금은 계속 빠지고 있다는 점도 의심을 부추겼다.
금융위기 이후 ‘메인 플레이어’로 등장
외국인의 원화채권 투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 대폭 늘어났다. 미국발 위기가 실물경기로 전이되자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고채 발행을 크게 늘렸는데, 마침 각국의 양적완화 정책 이후 늘어난 해외 자금이 갈 곳을 찾아 헤매다 한국을 비롯한 이머징 시장에 흘러 들어온 것이다.
한국거래소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008년 말 7.06%(20조848억원)에 불과했던 외국인의 국고채 보유 비중은 올 9월말 15.34%(59조9303억원)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상장채권 잔액은 865조원에서 1180조원으로, 이 가운데 국고채 발행잔액은 284조원에서 390조원으로 증가했다.
국채 발행이 늘어난 만큼 성공적인 발행이 정부의 주요 과제가 됐다. 참가자가 제한적인 내국인 투자자만으로 늘어난 물량을 소화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외국인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하지만 외국인 투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부작용을 낳기 시작했다. 어쨌든 외국인이 채권을 사려면 원화 환전이 필요하고 이에 따라 환율 변동성도 커질 수밖에 없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환율의 잦은 등락이 반가울리 없다. 결국 WGBI 가입 논의는 쑥 들어가고 정부는 자본유출입 완화 방안의 일환으로 작년 말 채권 과세를 부활시켰다.
채권 시장 내에서도 외국인의 움직임에 따라 시장이 움직이는 현상이 빈번해졌다. 대표적으로 자주 나타난 부작용은 외국인이 단기채 매수에 집중하면서 나타난 스퀴즈(유통물량이 부족한 채권을 매집해 금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 현상이다. 작년 말 채권 시장의 이슈가 됐던 지표채권 이상 급등도 정부의 균등발행 실패가 불러온 결과였지만 외국인의 대량 매수가 1차 원인이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펀드의 부상…“쏠림 현상 우려”
영역을 확대해가는 외국인을 바라보는 정부와 시장참가자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외국인은 없어선 안될 수급의 한 축이지만 때로는 과도한 매수로 시장을 교란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시장 상황이 좋으면 외국인의 존재가 불편하기 짝이 없고, 나쁘면 아쉬운 심리는 소규모 개방국가인 이상 어쩔 수밖에 없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속내를 보면 고민의 내용은 예전보다 복잡해졌다. 외국인의 투자 규모가 늘어나는 그 자체보다, 특정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외국인의 투자 규모뿐만 아니라 주체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많은 변화를 보였다. 금융위기 직전만 해도 외국인 채권 투자자 가운데 은행권의 보유 비중이 가장 컸지만, 금융위기를 지나면서 펀드의 입김이 세졌다.
신동준 동부증권 채권 애널리스트는 “2007년 상반기만 해도 외국인 투자자금이 적었는데 통안채와 통화스왑(CRS) 금리차 확대를 이용한 재정거래가 늘어나면서 외국인의 투자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며 “내외 금리차가 축소되면서 재정거래 유인은 줄었지만 금융위기 이후에는 장기적인 원화절상을 노린 펀드 자금이 이를 대체했다”고 설명했다.
국내 대형 자산운용사의 한 채권운용 담당자는 “외국인의 국채 투자 규모가 크다는 사실보다 일부 투자자가 많은 국채를 쥐고 있고, 이에 따라 시장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도 “특정 세력이 많은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현상이 바람직하진 않다”고 말했다.
차이나머니의 공습
“짧은 시간 안에 미국이 중국의 식민지가 될 것이다.” 지난 8월 중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한 기자회견에서 이 같이 말했다. 중국과의 교역 확대를 추진하려는 계산이 깔려있지만 중국이 미국의 최대 채권국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립서비스로 치부하기 어렵다는 게 국제사회의 공통적인 반응이었다.
특정 국가의 채권 매수 확대는 외환 등 거시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를 함께 가진다는 점에서 민간의 투자와 구분된다. 작년 중국이 일본 국채를 돌연 팔았을 때 엔화 강세를 부채질한다는 비난을 했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미국과 중국의 `날 세우기` 과정에서 중국의 미 국채 보유가 심심찮게 언급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때문에 외국계 펀드와 같은 민간 부문의 투자보다 최근 세를 키우고 있는 중국의 원화 채권 투자가 더 걱정스럽다는 지적도 많다.
중국은 2009년과 2010년에 각각 1조7929억원, 4조6970억원의 국내 채권을 사들였다. 올해 9월까지 3조1285억원을 순투자해 규모가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컸다. 미국의 경기둔화와 유럽의 재정위기로 외환보유고를 다변화해야 할 시점에서 한국이 매력적인 투자처로 부상했다는 게 주된 이유로 추정됐다. 과거 한국시장을 찾지 않았던 카자흐스탄 등 다른 아시아 국가도 한국 시장의 문턱에서 기웃대기 시작했다.
중국이 외환보유액 다변화 차원에서 한국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정작 장기적으로 투자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중국의 판단에 달렸다. 장기투자를 유도할 제도적 장치가 없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불편한 현실’인 셈이다.
때문에 시장에서는 우리나라 정부가 외국 자본유입의 속도를 떨어뜨리기 위해 추가 규제를 도입할 것이란 전망이 높아지고 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도 8월초 “외국인 투자자들의 (채권투자)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기존 과세율 강화, 채권 매입 공시, 지역별 쿼터제 등이 유력 안으로 추정됐다.
정부도 규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재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지금은 규제를 생각할 상황이 아니지만 시장과 같은 우려를 가지고 있다”며 “그리스 위기는 언제 해결될지 알 수 없어 금융시장이 좀 잠잠해지면 다시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