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HSBC의 이동진 부지점장입니다.
(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그 당시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없나요.
▲에피소드랄 것 까지는 없고 나쁜 일화가 있었죠. 요즘 증권사에서 채권 브로커를 하시는 분들이 돈 많이 벌죠? 인센티브도 많이 생겨났고 말입니다. 지금은 채권을 샀다 팔 때 파는 사람이 1만원당 1원꼴로 수수료를 붙여주지만 그 당시는 달랐습니다. 1년은 0.1%, 2년은 0.2% 이런 식으로 수수료가 정해져 있었어요.
-거래대금의 0.1%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회사채를 거래하게 되면 증권사로 들어가는 수수료가 장난이 아니었고 브로커들도 회사채 중개를 선호했죠. 제가 주니어딜러 시절에 제 사수가 잠깐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어요. 지금 워낙 오래돼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제가 트레이딩을 하면서 수수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겁니다. 대충 12.5%에 샀다가 10.0%에 팔면 먹는다는 것만 알고서 매매를 했더니 나중에 보니까 수수료를 양쪽으로 내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아주 큰 실수를 한 거죠. 수수료로 낸 돈도 엄청났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데이트레이딩을 하신 건데요. 그런 거래를 자주 했습니까? 그걸 보고 따라하신 건가요?
▲그렇기도 했고 당일날 수익률이 많이 움직이니까 그렇게해도 된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데이트레이딩을 하고 나면 남들보다 거래량이 무척 많아집니다. 거래량도 많고 하니 브로커가 다른 사람들보다 저에게 더 자주, 더 먼저 전화하게 되죠. 정보수집 차원에서 남들보다 한 발 앞서나갈 수 있는 거죠.
<”증권사가 기관간의 중개인이라면 저는 증권사와 증권사간의 중개인 역할을 했어요”>
-그 때는 모든 거래가 전화로 이뤄졌을 텐데요.
▲다 전화였죠 뭐. 인터넷 메신저가 등장한 것이 불과 1~2년 정도 아닙니까. 두 대 정도의 전화를 가지고서 엄청난 속도로 일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증권사가 어찌보면 기관과 기관간의 중개인랄 수 있는데 저는 증권사와 증권사간의 중개인 역할을 했어요. 그럴 정도로 시장이 소위 말하는 “마바라” 시장이었습니다. 정보교환이 지극히 부진했고 증권사간의 교류는 아예 없다시피했어요. 서로를 경쟁자로만 인식하다보니 의견을 공유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가 없었죠. 저는 두 증권사를 연결해주면서 양자를 해피하게 해줬습니다. 물론 차익도 남겼지만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저에게 거래가 많이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거래량을 유발해 정보를 집중적으로 수집한다” 라는 전략이군요. 그것은 BTC의 원래 작전이었습니까. 트레이딩 기법 말입니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작전이랄 것도 없었구요. 요즘이야 한국 채권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많은 외국계 기관들이 다녀가기도 하고 투자도 많이 하지만 그 당시야 어디 그랬겠습니까. 참가자가 많지않은 상황에서 저 혼자 그냥그냥 하다보니까 기회도 생기고 거기에 요령껏 맞췄다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겁니다.
-지금도 데이트레이딩을 규정으로 금지하는 회사도 있습니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요. 당시 BTC의 회계나 백오피스쪽에서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까?
▲네. 많은 뒷받침을 해줬어요. 누가봐도 명백히 법을 어긴 상황이 아니었고 제가 채권을 해보겠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좋게 봤던지 BTC에서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자체적인 채권시가평가 제도를 만들다>
-그 때 딜링 파트너는 주로 누구였습니까?
▲딜링 파트너가 누구인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증권사를 통해서 거래했으니까요. 다만 당시 채권매매를 활발하게 한 곳은 저와 장기신용은행 정도였습니다. 다른 곳은 딜링이 아니라 buy & hold 전략을 구사했으니까 활발한 거래를 했다고 볼 수는 없었구요.
우리나라에서 시가평가 시스템은 지난해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1988년 무렵 BTC에서는 원시적이나마 이 시가평가 방법을 도입했었어요. 당시 저는 딜링을 하면서도 백오피스와 같이 평가시스템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갔어요.
지금처럼 매일매일 시가평가에 필요한 객관적인 자료를 입수할 수 없었지만요. 기억나는 것이 뭐냐면 당시 risk management 팀에서 저에게 “오늘 레이트(rate)를 구해달라”고 얘기했던 겁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럼 현재 제가 들고 있는 모든 채권에 대한 평가를 해야했죠.
-매달 평가이익과 손실을 일일이 기록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증권사에 전화를 걸어서 제 채권에 관해서 물어봤습니다. 백오피스 사람들이야 증권사 사람이 누구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그 사람들이 전화한다면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을테니까. 80년대 후반~90년대 초에는 그 방법만 해도 대단히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하다가 가지고 있는 채권의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횟수가 늘어났습니다. 규모도 규모거니와 처음에는 일년짜리만 하다가 나중에는 다른 것도 하게 됐구요. 90년대 중반에는 거의 매일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백오피스 쪽에서 스스로 평가를 하겠다고 증권사 전화번호를 넘겨달라고 하더라구요. 제가 속이거나 부정한 방법을 쓴 건 아니었고 좀 더 객관적이고 개량된 시스템을 도입한다는 거였어요. 싱가폴쪽의 보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서히 업무분화가 일어난 거군요.
▲맞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80년대부터 시가평가 시스템이 도입됐지만 한국까지 그 방법이 넘어오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미국에서도 몇몇 투자은행을 제외하고는 사실 많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증권사로 전화하는 일이 껄끄럽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까. 꼭 무슨 시험지 답안을 맞춰보는 느낌일 것 같습니다만
▲물론 그런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오늘 일주일 전망을 가지고 어떤 채권을 샀습니다. 그런데 증권사 쪾에서는 오늘 마이너스라면서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채권규모가 커지고 위험관리의 필요성이 나날이 늘어나면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경제지표보다는 딜링 파트너들의 매매동향을 체크>
-당시 채권시장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유동성도 무척 작았을텐데요. 채권 가격변화를 그렇게 자주자주 체크하셨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주목해서 봤던 indicator 들은 무엇이었나요?
▲물가를 비롯한 경제 거시지표는 사실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거시지표가 채권시장에 영향을 주는 수준도 아니었구요. 많은 사람이 딜링을 해야 새로운 indicator가 무엇인지, 어떤 파급효과를 지니게 될 지에 주목하겠지만 그런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트레이딩이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보니 오히려 타 기관의 동향이나 매매형태에 더많은 신경을 썼어요. 그리고 “한국은행이 자금을 풀 것 같냐, 빨아들일 것 같으냐” 의 문제들, 주가지수..뭐 그런 정도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채권에 재미를 붙이게 된 계기라도 있었습니까.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88년에 채권과 인연을 맺은 이후 실적이 괜찮게 나오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규모를 늘려가면서 “해볼 만하다” 는 생각도 가지게 됐죠.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해서 적용시키는 것도 흥미있었구요.
당시 한국에는 선물시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은행에서 관리하는 부분 중에서 달러 대출 및 예금도 있었거든요. 이것을 헤지하고 포지션을 잡기 위해 미 달러 금리선물시장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제가 한국에서 두번째로 미 달러 금리선물시장 거래를 한 사람입니다.(웃음) 정확하게는 유로/달러 이자율 선물(euro/dollar futures) 인데 처음 거래를 한 사람은 씨티은행에서 근무하던 분이었어요. 이분이 트레이딩 목적으로 씨티은행 자금부에서 그 일을 하더라구요. 대한민국에서 미 금리선물을 거래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라는 소리를 듣고 제가 씨티은행으로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는거냐? 나에게도 좀 가르쳐달라”고. 그 일을 배워서 BTC에서 해보니까 재미있더라구요. 밤에 미 금리 동향을 체크하고 하여간 신기했습니다.
어쨌든 크게 손실을 본 적도 없었고 남들이 하지않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다보니까 채권에 흥미를 가지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차차 제 밑으로 사람들도 들어왔죠.
<새로운 상품에 대한 도전과 채권딜링의 승부수>
-가장 기억에 남는 딜은 무엇입니까.
▲90년대 초반 금리가 급격하게 빠진 적이 있습니다. 14%에서 12%로 뚝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개발신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게 뭐냐면 바로 예금증서입니다.
요즘은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기업대출 때 관행적으로 “꺾기” 가 있었잖습니까. 기업들이 대출받기가 힘드니까 사람들이 이 때 모두 CD(양도성예금증서)를 사용한 거에요. 대출 3개월짜리를 받고 CD를 받거나 대출 1년짜리를 받고 3개월마다 roll-over를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귀찮아져서 그랬는지 “차라리 2년짜리 대출을 받고 1년짜리 개발신탁을 가져가라”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기업들로서는 당연히 그 개발신탁을 팔 수밖에 없었고 이게 증권사로 넘어왔어요. 증권사에서도 이걸 팔아야하니까 저에게 사줄 수 있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2년짜리 개발신탁과 통안채 스프레드를 혼합해서 거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만 한 것이 아니라 몇몇 다른 사람들도 했는데 시장이 순식간에 불어나더군요.
이 때문에 제가 개발신탁, 통안채, 회사채를 무척 많이 들고 있었습니다. 2~3개월 사이에 금리가 2%p이상 빠졌는데 어느 순간 저는 가지고 있던 모든 채권을 다 팔았어요. 그 당시 분위기는 올해 1월처럼 “채권은 더 간다” 였습니다. 다들 “금리 한자리 수 온다” 를 외치는 상황이었죠. 사실 90년 초에 금리 한 자리 수는 상상도 하기 힘든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워낙 사람들이 금리가 더 떨어질 것이라고 몰려드니까 단기간에 급격한 하락이 가능했던 겁니다.
금리가 더 떨어진다는 것이 대세였는데 제가 채권을 파니까 사람들이 저보고 그러더군요. 도대체 이거 팔아서 뭐할 거냐고. 콜금리도 낮은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개의치않고 규모를 무지무지 많이 줄였더니 바로 금리가 바닥을 찍고 올라갔습니다. 물론 그 후에는 그 때처럼 잘 맞춘 적은 없었습니다.(웃음)
-아무 이유없이 그냥 느낌만으로 채권을 내다팔기 시작했습니까.
▲너무 과도하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승부수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때처럼 흥미진진했던 딜은 없었어요.
<외환위기를 온몸으로 체험>
-미 금리선물이니 개발신탁이니 해서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신 예가 많은데요. 하지만 처음 해보는 일은 그만큼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망설여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대단한 자신감이 없으면 섣불리 결정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만.
▲하하. 그 당시는 아무래도 젊었으니까 “무대포” 로 달려들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때그때마다 합당한 이유는 있었지만요. 어느정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97년 외환위기 당시 잠시 BTC를 떠나 나라종금으로 가셨죠? 그리고 곧 BTC로 다시 복귀하셨는데…IMF 때 종금사로 이동했다는 것이 좀 이상하네요.
▲97년은 제가 BTC에서 만 12년째 근무하던 해였습니다. ‘외국계 은행에서 이 정도 근무하면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당시 나라종금은 종금업계에서 많이 앞서나가는 곳이었고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던 몇몇 분들이 옮겨가서 “뭔가 해보자”는 분위기가 일어났었습니다. 옮길 때만해도 해태, 기아가 터질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선택을 잘못한 것이 돼 버렸죠.
요즘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그 때만해도 선배들 중 제게 “언제까지 외국계 은행에서만 근무하고 있을래?”라고 말하는 분이 계셨어요. 그리고 나라종금으로 먼저 옮겨간 선배들이 자금부를 한 번 맡아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또 나라종금이 그 무렵 해외은행과의 합작도 진행하고 있었구요. 그래서 ‘내가 외국계 은행에서 배운 것을 내 팀을 만들어서 제대로 해보겠다’ 는 생각으로 이직한 겁니다. 그게 97년 3월입니다
지금도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씀하세요. “시장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아는 거 아니냐. 97년 1월 한보사태가 터졌을 때 감을 잡았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저는 감을 못 잡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허허. 실은 제가 그 1년전에 호주에 가 있었어요. 그래서 국내시장 동향을 파악하는 감이 떨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아까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죠.
나라종금에 가서 고생 좀 했죠. 당시 언론들이 심심하면 쓰는 기사가 “불쌍한 종금사 국제부담당~”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제가 바로 그 신세가 된 겁니다. 그 때 가족들은 호주에 두고 왔었기 때문에 고생을 더 많이했죠. 고생하는 것은 그나마 견딜만했어요. 그러다 회사가 영업정지를 당하니까 할 일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러니 뭐합니까. 직원들과 술 마시는 것이 일이었죠.(웃음) 그러던 와중에 이전 상사셨던 강 행장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너 거기서 놀면 뭐하냐. 나 요즘 좀 바쁜데 와서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일 욕심이 무척 많은 분이시거든요. 그래서 다시 BTC로 돌아왔습니다.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