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컴 붐을 타고 주식 열풍이 휘몰아 쳤던 지난 2000년. 김씨는 '대박'을 꿈꾸며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한푼두푼 모은 거금 5000만원을 과감히 투자했다. 처음엔 주가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금새 수익률이 30%를 웃돌았다. 나도 이제 꽤 부자란 생각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김씨를 들뜨게 만들었던 기쁨은 잠시. 닷컴 버블이 꺼지며 일년만에 투자한 돈이 거의 반토막났다. 절망적이었다. 손해를 만회해 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상황은 악화됐다. 자기가 산 주식은 가격이 떨어지고, 갖고 있던 주식을 팔면 기다렸다는 듯이 올랐다.
몇해가 지난 후 김씨 수중에 남은 돈은 겨우 1000만원. 손해를 만회하려고 추가로 투자한 돈까지 고려하면 지난 6년간 6000만원 정도가 날아갔다. 1년에 1000만원꼴로 잃은 것이다.
김씨는 이제 '주식'이라면 손사래부터 친다. "주식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가득하다. "요즘 안락한 노후를 위해 주식에 장기 투자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지만 선뜻 나서기 꺼려지는 게 사실"이라며 한숨을 짓는다.
"대박을 꿈꾸고 묻지마 투자를 한 책임이 있긴 하지만, 이제 주식에 투자하는 것보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편이 나을 것같다"는 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다.
국내 주식시장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일부에선 '주식을 하면 패가망신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뢰가 무너져 있다.
한국에선 여전히 주식이 건전한 '투자(投資)' 수단이 아닌 '투기(投機)'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 주식은 패가망신 지름길?
국내 주식시장에 대한 불신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주식시장이 걸음마 단계이던 때부터 이같은 불신이 싹텄다.
지난 1975년부터 3년간 불어닥친 건설주 파동이 대표적이다. 당시 중동특수와 맞물려 건설주가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주식열풍에 빠졌다.
3년간 건설업종은 무려 5000% 이상 올랐다. 건설증권과 건설화학 등 단지 ‘건설’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이유로 주가가 폭등한 사례도 있다.
그야말로 '묻지마 투자'의 전형이었다. 지나침이 과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후유증이 무척 컸다. 시골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일부 농부들까지 주식 바람이 불어 땅 팔고, 소 팔아 주식 투자에 나섰다가 쪽박을 찬 사례까지 나타났다.
주식시장에 대한 불신은 지난 2000년을 전후한 닷컴주 버블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증권사 창구엔 장바구니를 든 아줌마부대까지 등장했다. 빚까지 내 투자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때 마침 외환위기로 강제 내지 명예퇴직을 당한 사람들은 마지막 보루인 '퇴직금'을 싸들고 증권사 창구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일년 남짓. 주식투자 열풍이 지나간 결과는 참담했다. 닷컴주의 거품이 걷히고, 경기마저 침체에 접어들자 주가는 바닥 모르게 떨어졌다.
지난 1998년 외환위기에 발목이 잡혔던 코스피 지수(연평균)는 406.07을 기록했다. 다음해인 2001년엔 닷컴붐에 힘입어 806.83으로 껑충뛰었다. 닷컴 붕괴 조짐이 보이던 2000년엔 734.22, 2001년엔 576.31로 추락했다.
주가 하락은 그대로 개인 투자자 피해로 나타났다. 일확천금을 노리며 '묻지마 투자'에 나섰던 소위 개미들의 꿈은 닷컴 거품과 함께 허망하게 날아가 버렸다.
닷컴 거품이 꺼지면서 개인 투자자들의 가슴엔 불신만 남았다. 더이상 주식 투자를 않겠다며 밀물처럼 시장에서 빠져나갔다.
주식 시장도 차갑게 얼버붙었다. 외환위기를 지나 닷컴 붐이 절정에 달하던 지난 2000년 1205조원이었던 연간 주식거래대금은 다음해 917조원으로 떨어졌다.
특히 유가증권 시장은 지난 1999년 867조원을 정점으로 낮아져 2000년 627조원, 2001년 491조원으로 2년새 무려 40% 이상 줄었다.
그 결과 국민들에겐 주식은 '도박',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란 인식이 확실하게 심어졌다.
◇ 줄잇는 금융사고..투자 분위기 찬물
지난 해부터 국내 주식시장이 불신을 딛고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저축의 시대가 가고 투자의 시대가 왔다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 주식투자에 다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마침 은행창구에서 펀드가 본격적으로 판매되면서 간접투자 붐도 일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같은 투자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각종 금융 사고 소식이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증권사 직원이 고객 돈을 마음대로 유용하고, 횡령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일부 증권사 직원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개인 투자자들에게 다시 불신을 심어주고 있다.
공영대 대우증권 감사실장은 "직원들의 횡령 사고를 막기 위해 고객들의 도장과 주식거래 카드를 아예 갖고 있지 못하게 단속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부 고객들과 직원들이 편의상 이같이 거래를 하고 있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정부 관리당국과 증권사들의 자정 노력으로 증권사 금융 사고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지난 2001년 24건이던 증권사 직원의 횡령 및 유용은 2002년 20건, 2003년 15건, 2004년 13건으로 차츰 감소했다. 지난해엔 10건만 적발됐다.
그러나 횡령 및 유용 금액은 지난해 오히려 크게 증가했다. 지난 2002년 464억원으로 최대를 기록한 후 대폭 줄었지만 작년에 207억원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 그만큼 횡령 사건을 일으킨 증권사 직원들이 대담해진 것이다.
증권사의 모럴 해저드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일부 증권사의 잘못된 관행이 투자자들의 불신을 키우고 있다.
대우채 사건이 대표적인 증권사 모럴 해저드 사례로 꼽힌다. 증권사들이 위험이 있는 투자상품을 마치 저축상품인 것처럼 팔았다가, 대우사태가 터지면서 펀드에 엄청난 손실이 발생한 사건이다. 그 결과 투자자들이 주식시장 뿐만 아니라 증권사까지 불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 자본시장 불신부터 해소해야..아직 갈길 멀다
전문가들은 주식시장이 국민들에게 건전한 투자의 장으로 인식되기 위해선 "시장의 투명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박천웅 우리투자증권 전무는 "주식은 속성상 안전자산이 아니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항상 내재한다"며 "따라서 주식시장과 기업들의 투명성이 담보돼야 투기가 아닌 투자가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과거 한국 주식시장이 투기적인 모습을 보였던 건 시장 투명성 떨어져 투기적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주식시장에서 투자 정보가 평등하게 공개되고, 기업들이 투자자들이 신뢰할 만큼 투명한 운영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건전한 투자 환경이 조정된다는 것이다.
박 전무는 "개인 투자자들도 주식시장에서 단기간에 큰 돈을 만들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도 시장을 투기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 투자자들의 성급한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시장은 신뢰를 먹고 산다. 투자의 시대에 걸 맞는 환경이 조성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시장의 불신을 해소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직 우리의 갈 길은 멀었다.
* 협찬 : 대우증권, 미래에셋증권, 삼성증권, 한국투자증권, 현대증권, 증권선물거래소, 증권예탁결제원, 한국증권업협회, 자산운용협회 |
* 후원 :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 |
* 도움주신 분들 : 강창희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장, 김일선 자산운용협회 이사, 변진호 이화여대 경영학부 교수, 임종록 한국증권업협회 상무, 최창환 대우증권 전문위원 (가다나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