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거래는 불발됐다. 매도자측에서 채권 액면가의 40%에 달하는 프리미엄(금리웃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A씨는 “올 들어 4명의 고객으로부터 묻지마 채권 의뢰를 받았다”고 전했다. 현재 약2000억원어치의 묻지마 채권이 상환되지 않은 채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다.
◆찾아가지 않은 채권 1961억원어치
정부가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재원 마련을 위해 자금출처 조사 면제 혜택을 주며 3조8735억원어치 비실명 채권을 발행했고, 사업가·고소득 전문가·거액 상속자 등 자산가들이 매입했다. 이 채권은 2003년 12월 말 모두 만기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현금으로 찾아가지 않은 금액이 1961억원에 달한다. 채권 상환 업무를 담당하는 한 증권사 직원은 “작년 이후 1000만원짜리 소액권이 아주 가끔 들어오는 것 외에는 거의 상환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묻지마 채권’ 중 중소기업구조조정채권과 고용안정채권은 현재 채권을 보유하더라도 이자가 전혀 지급되지 않는 데다 채권 운용기간(만기 5년)에 나왔던 이자마저도 받을 수 없는 상태다. 증권금융채권은 2008년 8월까지는 운용기간에 나온 원리금을 지급받을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원금만 보장받는다.
묻지마 채권이 이자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종적을 감출 정도로 품귀 현상을 빚는 이유는 무얼까. “K씨는 20억원 상당의 증권금융채권을 24억6000만원에 샀다. 채권 상환시 받을 수 있는 원리금보다 23%의 프리미엄을 더 얹어 주고 구입한 것이다. 그러나 K씨는 자녀에게 물려줄 50억원 가운데 20억원을 ‘묻지마’ 채권으로 바꾸면서 30억원 초과분(20억원)에 대한 상속세 50%(10억원)를 내지 않게 됐다. 결국 K씨는 절세금액 10억원에서 채권 프리미엄(4억6000만원)을 뺀 5억4000만원을 절약한 셈이다.” 한 시중은행 재테크팀장의 설명이다. 묻지마 채권은 상속·증여세 회피용은 물론 비자금이나 정치자금 세탁용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다고 시장 관계자들은 전했다.
◆채권가격+20~30% 웃돈 붙여 거래돼
묻지마 채권을 구입하려는 사람은 이자 등 수익성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 상환금액(채권가격)에 20~30%의 프리미엄을 붙여 거래되는 게 보통이다. 예컨대, 증권금융채권(원리금 1억3000만원짜리)의 시중 가격은 1억5000만원 정도. 채권중개상 B씨는 “상속·증여세의 최고세율인 50%에 비하면 프리미엄이 싼 것 아니냐”며 “이 정도의 차익을 노리는 고객들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채권 전문가들은 2000억원 상당의 묻지마 채권 상환이 원금을 돌려주는 마지막 시점인 2008년쯤에 쏟아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채권중개상 B씨는 “돈을 찾아가도 조사를 안 하겠다고 하지만 누가 찾아갔는지 실체가 드러나는 게 부담스러워 계속 채권만 들고 있는 고객도 있다”며 “고객들 중에는 현 정권이 끝난 뒤인 2008년에 채권을 내놓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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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채권’이란 정부가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경제난 극복을 위한 재원 조달 차원에서 한시적으로 발행한 ‘비실명(非實名) 채권’이다. 이 채권을 구입한 자금은 누구든 출처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묻지마 채권’이란 이름이 붙었다. 당시 한국증권금융, 중소기업진흥공단, 근로복지공단 등이 증권금융채권, 중소기업구조조정채권, 고용안정채권으로 총 3조8735억원어치를 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