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도가 불거진 것은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의 연쇄살인범들 때문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이들의 이름, 범행 동기, 과정들을 대하면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어 말이 나오질 않는다. 구속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주는 뻔뻔스러운 태도는 사형만으로도 모자란다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악마가 들어간 입구라고 생각한 나머지 마녀의 몸에 난 점에 꼬챙이를 꽂아 몸 안을 들여다 보고 싶어했던 중세의 이단 재판정처럼 이들 살인범들의 머리를 열고 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고 싶다.
유럽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사형제도를 폐지했지만 여전히 사형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나라들이 많으며, 지난 11년 동안 사형을 집행하지는 않았지만 한국도 사형제도가 존속하는 나라이다.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바티칸의 <최후의 심판>, 사형제도를 보여줘
바티칸에 가는 이들은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러 모두 빠짐없이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본다. 시간이 없거나 미술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은 아예 이 두 그림만으로 만족하고 바티칸 박물관 관람을 끝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두 그림은 규모가 너무 커서 자세히 보기 힘든 그림들이다. 게다가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그리 크지 않은 시스티나 예배당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특히 <천지창조>는 천장에 그려진 그림이어서 한참 동안 고개를 들고 올려다 보아야 하기 때문에 목이 아픈 나머지 조금 보다가 포기하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은 이래저래 지친 나머지 미켈란젤로가 그린 또 한 점의 걸작인 <최후의 심판>은 대충 보고 발길을 돌린다.
하지만 형법 학자나 교정 시설에서 근무하는 이들이라면 두툼한 책이라도 한 권 사서 참고해가며 오히려 <최후의 심판>을 더 유심히 볼 것이다. 이 그림에는 다양한 사형 방식들이 묘사되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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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에는 달구어진 석쇠 위에 올라가 순교를 한 산 로렌초(생 로랑, 세인트 로렌스)가 보이며, 이외에도 그림 오른편에는 못이 박힌 수레바퀴를 들고 있는 성녀 카타리나, 한 손에 한 줌의 화살을 들고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 등이 보인다. 카타리나는 수레바퀴에 치여 죽었고 세바스티아누스는 화살에 맞아 순교를 한 로마 장군으로 모두 기독교 순교 성자들이다. 또 쇠빗을 들고 있는 성자는 성 블레이즈인데, 이 성인 역시 쇠빗으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을 당해 순교를 했다. 그림 속에 나타난 성자들은 이렇게 순교의 전설과 함께 모두 고대 사형 집행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최후의 심판>에서 가장 위대한 순교를 한 이는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인데, 유대교 율법판을 닮은 그림 상단의 두 반원 속에는 각각 가시 면류관, 십자가, 채찍형을 당할 때 예수가 묶여 있던 기둥들이 묘사되어 있다. 십자가도 사실은 고대 로마의 사형 집행 방식 중 하나였다.
그림에는 또 한 사람 끔찍한 형을 받은 인물이 들어가 있다. 다름 아니라 그림 오른 쪽 하단에 나타난 지옥의 악마인데, 당나귀 귀를 갖고 있는 이 악마의 몸을 왕뱀이 칭칭 동여매고 있고 악마의 생식기는 왕뱀의 입에 물려있다. 실제 모델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고 모두 옷을 벗고 있어서 흉하다고 욕을 한 사람인데, 화가가 슬쩍 그려 넣은 것이다. 미사 집전을 총괄하던 이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란 나머지 교황에게 삭제해달라고 청을 했다. “지옥의 일은 내 소관이 아니네……” 미소를 띤 교황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사형제도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유형을 살펴보면 사형을 당해 죽을 때에도 신분과 죄의 종류에 따라 차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칼로 머리를 자르는 참수형은 일반적으로 귀족들에게 내려지는 사형이었고, 이단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이들은 대개 화형을 당하곤 했다. 잔 다르크 역시 18살 꽃다운 나이에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심판을 받고 마녀로 몰려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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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에서 마차를 상대로 강도 짓을 한 죄인들에게는 마차 바퀴에 치여 사형을 당하는 형이 내려지곤 했다. 위폐범들은 끓는 기름 가마에 넣어지곤 했으며, 가장 흔한 교수형은 도둑들에게 가해지던 사형이었다. 갱들이 은행을 털다가 보안관에게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을 서부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형제도는 능지처참형이다. 인두로 지지고 칼로 자르는 등 잔혹하게 고문을 한 다음 천천히 죽이는 사형인데, 주로 친부 살해와 국사범들이 이 방식으로 처형되곤 했다. 이는 부권과 왕권 사이의 유사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이외에도 굶어 죽이는 아사형, 동물들에게 던져 죽이는 형, 근대에 들어 시행된 총살형과 전기의자형, 가스실에서 집행하는 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사형 방식이 존재한다. 법을 통해 사람을 죽이는 데에 이렇게 많은 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몸서리가 쳐지기도 한다.
사형 중의 사형, 단두대형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사형하면 단두대가 먼저 떠오른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단 기간에 죽여야 했기 때문에 고안된 사형도구인데, 최근까지도 사용되었다. 흔히 길로틴으로 불리지만 이는 아이디어를 낸 기요탱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영어 식으로 부른 것이다. 기요탱은 해부학 의사였고 혁명 위원이기도 했던 자다. 현재의 콩코드 광장과 파리 동쪽의 나시용 광장에 단두대를 설치해놓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물론이고 수많은 성직자와 귀족들의 목을 잘랐다. 죽어야 될 사람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다. 화학자 라브와지에 같은 이는 징세청부업자가 직업이어서 연구가 끝나면 단두대로 가겠노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죽어야만 했다. 프랑스는 왕의 목을 친 나라로서 유럽의 입헌 군주제 국가인 스페인, 영국, 덴마크, 스웨덴, 벨기에 등과 달리 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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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점의 그림은 런던 국립 미술관에 있는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의 그림인데, 제인 그레이를 처형하는 장면이다. 16세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림은 19세기 초반에 그려졌다. 9일 동안 왕좌에 올랐다가 헨리 8세의 딸이 꾸민 음모에 휘말려 사형을 받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치마나 공개처형을 당했지만 성 안에서 처형을 당한 것처럼 묘사된 점 등 고증에 문제가 많은 그림이지만, 이 그림에서도 가녀린 제인의 목에 어울리지 않는 큼직한 망나니의 도끼가 시선을 끈다.
제인 그레이의 처형은 물론이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의 처형은 모두 만인이 지켜보는 광장에서 이루어진 공개 처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옛날에는 그랬다. 그 정도가 아니라 사형이 집행되는 날은 일종의 축제일이나 다름 없었다. 인근 술집은 대목을 보는 날이었고 동네 사람들만이 아니라 소문을 듣고 찾아온 외지인들까지 몰려들어 북새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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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경기도 지사를 비롯한 이들은 “사회 기강” 운운하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라고 할 것이다.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형법 학자들이 백여 명 모여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보기에, 사형제도는 범죄자를 응징하고 격리시키는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인권과 인간 생명 자체에 당연히 부여되어야 하는 초월적 존엄성을 부인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며, 더욱이 사형이 인간이 만든 법으로 인간 생명을 앗아가는 제도라는 점을 인식하면 더욱 폐지되어야 할 제도다.
그렇다면 범죄자의 손에 의해 죽어간 죄 없는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논의의 범주와 층위를 혼돈하면 곤란할 것이다. 죄는 죄로서 다스려야 하고, 희생된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은 모든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처럼 역시 존엄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생명과 인권이 중요하기 때문에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죄인들의 생명을 인간이 만든 법으로 빼앗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무슨 인권이 있고 이미 죽었는데 무슨 생명의 존엄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개인의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이 아닌 “신도 동물도 아닌 인간 일반”의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만든 법의 이름으로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합법화해서는 안 된다고 답할 수 있다.
인간은 질병, 노쇠, 우연한 사고 등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이유들로 죽어간다. 때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죽음은 인간 조건의 하나로써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일년에 수 십만 명이 자동차 사고 등의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반면 수많은 생명을 구한 의로운 죽음도 있다. 또 죽음에는 전쟁, 기아, 범죄에 의한 순수하게 인간의 손으로 자행되는 죽음도 있다.
죽음에는 이렇게 수많은 종류와 다양한 의미가 있으며 결코 동일하지 않다. 누구나 전쟁과 범죄와 기아에 맞서 저항하며 목숨을 바쳐서라도 무찌르려고 한다. 왜일까? 전쟁과 굶주림과 범죄는 악이기 때문이다. 이 악은 개별 생명체에 대한 악이면서 인간 자체를 부인하는 행위이며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악이 인간을 도구로 보는 인간에 대한 전혀 잘못된 관념과 의식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한번 태어난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며 초월적 의미를 지닌다. 이때 초월적 의미란 생명 그 자체의 속성이자 보호받아야 할 권리이며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부여하는 의미 그 자체다. 사형 제도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이 의미를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부인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 때부터 법은 질서 유지라는 제한된 영역을 벗어나 인간과 사회를 생각하고 정의하는 종교적, 철학적 작업과 그 필요성을 위협하는 월권 행위를 자행하게 된다.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듯이, 사회 역시 법만으로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 만일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순진한 사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아니면 독재자이든지. (사형제도를 지지하고 사회기강 운운하며 법 질서 회복을 외치는 이들의 말대로, 사실 법대로만 이 사회가 유지되었다면 박정희 정권도 전두환 정권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박연차 사건이나 노건평 사건 같은 이른 바 “퇴임 후 비리”도 반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벌써 걱정이 앞선다. MB 후에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 우리는 법대로를 외치거나 사회 기강 운운하는 이들의 말을 그 자가 우파이든 좌파이든 결코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형은 법으로 만든 인위적인 죽음이다. 법은 결코 인간의 생명 자체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 직전까지가 법의 영역이다. 가령 법은 자유를 제한할 수는 있다. 도끼에서 단두대로, 공개처형에서 밀실 처형으로 그리고 이제 사형폐지론으로 법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수천 년의 인류 역사가 흐른 후에 형성된 이 흐름에 한국의 형법 역시 동참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의식도 인간에 대한 생각도 이 흐름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사형 대신 종신형으로 족하며, 어떤 면에서 보면 종신형이 사형보다 더 가혹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여행·문화·예술 포탈 레 바캉스(www.lesvacances.co.kr) 대표 정장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