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강국, 글로벌로 간다)<1부>②10년전엔 실패했지만

외환위기 前 해외진출 러시..`실패작` 오명
전략 다양화·리스크관리 능력 제고 `재무장`
"남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 접근 경계해야"
  • 등록 2007-11-22 오전 11:10:00

    수정 2007-11-22 오전 11:26:30

[이데일리 박호식기자] 1997년 11월, 한국 증권사에서 파견된 홍콩 주재원들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홍콩 금융가의 소문은 흉흉했다. `한국의 대형 투자신탁회사가 조만간 넘어진다 한다`, `한국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등등. 

소문이 아니더라도 불과 몇 달전에만도 800원대였던 달러/원환율이 1100원대로 급등하면서 원화로 받고 있던 봉급과 주재비가 팍팍해져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였다. 본사가 해외거점을 철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도 부쩍 자주 들려왔다.

       자료: 증권업협회
설마설마하던 그 모든 일들이 현실화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1월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그 해 12월 고려증권과 1998년 초 신세기투신이 영업정지 돼 퇴출되는 등 증권사와 투신사들이 잇따라 문을 닫았다. 증권사들은 이후 1~2년내에 해외거점들을 대부분 철수했다.

“1997년 봄부터 외환위기가 조금씩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한국계 금융기관의 자금을 조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자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거래선도 일방적으로 거래중단을 통보해왔다.
네트워크는 모두 망가졌고 많은 증권사들이 해외 거점을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외환위기 당시 대우증권 런던법인에 근무했던 유상호 한국증권 사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준비없는 진출·긴 후유증

실패작이었다. 비록 외환위기라는 불의의 사태를 맞아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하더라도, 이미 증권업계에는 증권사들의 해외진출 러시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 1992년 정부가 증시를 개방하자 그 해 하반기 국내 5대 대형증권사들도 해외 투자자 유치를 위해 홍콩, 런던 등에 거점을 마련했다. 이후 해외진출은 봇물을 이뤘고, 외환위기 폭풍이 휩쓸고 있던 1998년 6월말에도 해외사무소, 법인, 지점을 합친 해외거점은 58개에 달했다.

유 사장은 “런던에는 5개사만해도 치열한 곳인데, 많을 때 14~15개 증권사가 진출했었다”며 “어떤 증권사의 경우엔 CEO 등이 방문할 때 의전을 위해서 나와있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또 “시스템이나 노하우도 없이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나가다보니 외국계에게 주문을 받기 위해 국내 증권사간 수수료 출혈경쟁이 일었고, 외환위기로 잘 하고 있던 증권사도 무너지는 곳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현정수 대우증권 상무는 “약정경쟁을 하다보니 국내 증권사가 해외에 펀드를 만들어놓고 주문을 내는 소위 `검은머리 외국인`을 양산했고, 러시아채권 등에 투자했다 큰 손실을 보는 등 부작용이 많았다”고 말했다.

많은 증권사들이 실패작이란 평가를 낳으며 해외진출의 꿈을 접은 뒤 후유증은 한동안 지속됐다. 외환위기전 증권사의 꽃이라고까지 불렸던 국제부는 해체, 폐지되는 수모를 겪었다. 증권사 내부 또는 증권사와 다른 금융기관간에 한동안 투자실패에 대한 책임논란이 계속됐다.

◇다시 시작된 해외사업..”리스크를 감수하겠다”
 
한때 누구도 입밖에 꺼내기 꺼려하던 해외진출은 또 다시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올 6월말 현재 증권사 해외거점은 32개로 늘었다. 올 하반기 증권사들이 베트남 등에 적극적으로 거점을 마련한 것을 감안하면 해외거점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시 재개되는 해외진출, 증권사들은 10년전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을까. 10년전과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우선 해외진출 내용이 다양해졌다. 10년이 국내 증권업계의 모습을 바꿔놓았듯이 해외진출의 목적과 방법이 크게 변했다. 10년전 대부분 해외거점은 해외 투자자들 확보해 주식약정을 받는데 주력했다. 일부 해외 채권이나 파생상품 투자를 했지만, 외환위기로 투자기간이 그리 길지 못했다.

▲ IMF 이전 국내증권사들의 해외진출은 국내기업들의 해외 자금조달을 주선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사진은 런던서 동아건설이 DR을 발행한 후 기념식 장면. 자료제공:굿모닝신한증권
그러나 10년 후 지금은 여러 갈래로 해외진출이 모색되고 있다.
 
증권사들은 외국계 투자자 유치를 넘어 다양한 투자기회를 발굴하고, 국내 투자자에게 새로운 해외투자 기회를 제공하는 상품개발에 나서고 있다.
 
유통주식뿐 아니라 IPO주식, 기업 지분투자, 부동산 및 자원개발, 부실채권 인수 등 투자대상이 다양화되고 있다. 또 세계 곳곳에 투자할 수 있는 다양한 해외펀드가 속속 선보이며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증권업계는 나아가 현지에 증권사 또는 자산운용사를 설립해 국내 투자자가 아닌 해외투자자가 해외시장에 투자하도록 하겠다는 비전도 내놓고 있다. 증권사들은 이 같은 해외사업을 위해 현지 인력을 포함한 리서치 조직도 꾸리고 있다.

이 같은 해외진출은 대규모 투자를 수반해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 증권사들은 이 같은 일정 수준의 리스크는 필연적으로 보고 감내할 수준에서 리스크테이킹(risk taking.위험감수)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증자 등을 통해 자기자본을 확대하고 있다. 리스크를 감수할 규모가 돼야 해외에서 자기자본투자든 IB든 활발한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정수 상무는 “과거에 비해 증권사들의 리스크 관리능력은 많이 향상됐다”고 전했다.

◇ “남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심리 `경계 1호`”

그럼에도 여전히 우려는 많다. 10년전 해외진출 실패 과정에서 증권사들은 몇가지를 배웠다. 러시아 채권이나 태국 바트화 관련 상품에 투자했다 손실이 나자 `상품을 판매한 외국계가 위험고지를 하지 않았다`는 논란이 있었다. 그만큼 파생상품이나 투자대상 지역에 대해 기본적인 공부도 안된 상황에서 투자가 이뤄졌다. 돌아오는 수익만 봤지 위험은 보지 못했다. 또 충분한 준비없이 해외로 나가봐야 비용만 쓰게 되고, 출혈경쟁만 이뤄질 수 있다는 점도 배웠다.   
 
이동걸 굿모닝증권 사장은 “국가별로 접근전략이 달라야 한다”며 “예를들면 이슬람국가와 비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문화적 이해와 국가 신용도에 따라 리스크관리 비중과 수익을 현실화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제휴 상대(국가 또는 기업) 선정시 상당한 연구와 함께 제휴를 위한 시간과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며 “비즈니스에 대한 충분한 스터디와 협상 당사자와의 직접 대면을 통한 협의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정민 미래에셋자산운용 전략기획본부장은 “해외에 진출한 기업은 현지화에 실패한 사례가 많다”며 “해당국가의 제도 및 규제를 극복하고 우수한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성공적인 현지화가 성패요인”이라고 말했다.

유상호 한국증권 사장은 “자기역량과 특성에 맞게 진출해야 한다”며 “문화·경제적인 이해가 쉽고 관련성이 많은 곳부터 충분한 스터디를 거쳐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10년전 국내 증권사들은 러시아, 남미, 태국 등 관련 상품에 투자하거나 투자를 중개했다 큰 손실을 봤다. 해당 지역에 대한 충분한 리서치가 이뤄지지 못했고, 파생상품에 대한 이해도 적었다.

유 사장은 또 “베트남에 진출하기 위해 10년여를 준비했다"며 뚜렷한 목적이나 준비없이 너도나도 한 지역에 몰렸다가는 또 다시 출혈경쟁만 하다 실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협찬 :
삼성증권, 우리투자증권, 대우증권, 한국투자증권, 교보증권, 메리츠증권, 하나대투증권, 키움증권,
굿모닝신한증권, 한화증권, 현대증권, 미래에셋증권, 대신증권, 동양종합금융증권,
증권선물거래소, 한국증권업협회, 증권예탁결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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