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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이데일리 안승찬 특파원]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차로 한 시간을 달리면 탁 트인 멕시코만 바다가 나온다. 이곳 멕시코만 해변을 따라 길쭉하게 늘어서 있는 퀸타나섬에선 대규모 공사가 한창이다. 프리포트LNG 액화터미널을 건설하는 공사다.
이곳은 원래 미국이 LNG를 수입하려고 만든 곳이다. 설비도 LNG 수입에 맞춰 지었다. 외국에서 들여온 LNG선에서 액체상태의 LNG를 하역하고, 이를 다시 기체 상태의 천연가스로 만들어 파이프로 공급하는 기지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서 갑자기 셰일 붐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셰일광구 개발이 들불처럼 번졌다. 미국에서 생산된 천연가스가 갑자기 넘쳐났다. LNG를 어떻게든 처분해야만 했다. LNG를 수입하려고 만든 프리포트LNG는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수입기지에서 수출용 기지로 용도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천연가스를 수출하기 위해선 액화설비가 필요하다. 채굴된 천연가스에 영하 162도의 초저온과 초고압을 가해 액체형태인 LNG로 바꾸는 시설이다. 액체로 바꾸면 부피가 600분의 1로 줄어든다. 이동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프리포트LNG는 액화설비 공사에 총 140억~150억달러(약 16조~17조원)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에서 LNG 수출기지론 두 번째 큰 규모다. 한국의 SK E&S도 총 3개의 프리포트LNG 액화설비 트레인 중 한 곳에 투자했다. 2019년 하반기 상업운전을 시작하면서 SK E&S는 연간 220만톤의 미국 천연가스를 LNG 형태로 국내에 수입하게 된다. 한국에서 1년간 사용하는 천연가스의 16.4%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국은 전형적인 에너지 수입국이었다. 지난 60년간 천연가스를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양이 훨씬 많았다. 그러던 미국이 달라졌다. 미국은 내년부터 수출량이 수입량을 넘어서는 순수출국으로 돌아설 전망이다. 프리포트LNG 관계자는 “불과 10년 전에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변화”라고 말했다.
수입기지를 수출기지로 바꾼 美셰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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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일 개발은 기존의 전통적인 채굴 방식보다 훨씬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 셰일층은 지하 2~4km 깊은 땅속에 있다. 일반적인 원유층보다 더 깊다. 더 깊게 파내야 한다. 또 수직으로 내려가다 방향을 틀어서 다시 수평으로 시추하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구멍을 뚫은 이후엔 고압의 물을 쏘는 파쇄 작업이 필요하고, 시추가 끝나도 원유와 가스가 펑펑 쏟아지지 않는다. 전기 펌프 등을 이용해서 인위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미국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그랜트·가필드 카운티에서 셰일광구를 직접 생산하고 있는 SK이노베이션의 안형진 부장은 “셰일의 경우 한 개의 구멍을 뚫는 시추비용이 보통 300만달러(약 34억원) 정도 드는데, 전통적인 유전개발은 시추비용이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싸게는 10만달러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면서 “일반적으로 셰일의 개발비가 비싼 편”이라고 말했다.
비용이 많이 들고 방식도 복잡하기 때문에 그동안 자원개발업체들은 셰일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지만 대박을 내던 대형 유전개발이 급속하게 줄어들기 시작하자 셰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때마침 시추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생산단가가 국제유가보다 내려가기 시작했다. 개발비가 더 들지만 셰일은 실패확률이 낮다. 일반적인 자원개발은 성공확률이 10~20% 수준에 그치지만, 넓게 퍼져 있는 셰일층을 따라 옆으로 파고 들어가는 셰일개발은 어지간해서는 원유와 가스가 나온다.
SK도 지난 2014년 오클라호마주의 그랜트·가필드 카운티 지역에 진출한 이후 총 70개의 셰일광구를 시추했는데, 모두 원유나 천연가스가 나왔다. 안 부장은 “얼마나 수익성이 좋은 개발이냐가 관건이지만, 거의 모든 셰일 시추 때마다 원유나 천연가스가 나온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어떻게 셰일 종주국이 됐나
그럼에도 미국이 전 세계 셰일개발의 주도권을 갖게 된 건 생태계가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안 부장은 “전화만 하면 셰일 시추에 필요한 각종 장비와 인력을 모두 조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미국에 이미 갖춰져 있다”고 말했다.
개인이 광물권을 가지는 미국 특유의 제도 역시 미국의 셰일 붐을 부추겼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땅속의 광물의 소유권을 정부가 갖는다. 하지만 미국은 땅 소유자가 땅 속 광물권을 가진다. 이게 석유개발업체 입장에서는 훨씬 편리하다. 해당 국가와 이런저런 복잡한 협상할 진행할 필요가 없다. 개발에 필요한 땅 주인을 찾아가 리스요금을 지급하고 생산된 원유나 천연가스의 8% 정도를 제공하겠다는 수준의 계약을 체결하면 된다.
셰일의 이런 특성은 국제유가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안 부장은 “미국 셰일 개발의 주체가 다양하고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라 생산이 국제유가가 탄력적인 성향을 보인다”면서 “유가가 올라가면 셰일 개발이 확 늘었다가 유가가 떨어지면 셰일 개발이 줄어들면서 국제 유가를 위아래로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부 통상압박..미국산 에너지 수입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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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의 무역적자 문제도 일부 해소할 수 있다. 트럼프 정부는 잊을만하면 무역적자 문제를 꺼내 든다. 미국의 무역적자국인 한국에 대해선 노골적으로 통상압력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런 때 미국산 에너지를 수입하면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다. 올해 초 일본은 미국의 통상압력에 대응하고 에너지 수입 다변화를 위해 연간 LNG 수입의 20%에 달하는 1500만톤을 미국에서 들여오겠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도 미국산 수입을 늘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미국 LNG는 중동산과 가격 체계가 다르다. 중동 LNG는 국제유가에 연동해 가격이 움직이지만, 미국산은 미국 내 천연가스 수요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국제유가가 상승하더라도 셰일 개발이 많아지면 미국 내 천연가스 공급량이 늘어나 가격이 크게 올라가지 않는 구조다.
한국에겐 계약조건도 미국산이 유리하다.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한국과 일본 등의 국가들은 중동과 계약할 때 도착지를 제한해 다른 곳으로 팔 수 없도록 제한하거나 의무적으로 일정량을 수입해야 하는 의무인수규정 같은 불리한 계약 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신흥 사업자인 미국에선 이런 계약조항이 거의 없다. 한국이 수입한 물량을 다른 나라에 다시 되팔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SK E&S 아메리카의 임시종 법인장은 “미국산 LNG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작년에는 3%였지만, 오는 2022년에는 16%까지 늘어날 것”이라며 “세계 LNG 시장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