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라는 피 튀기는 전쟁을 경험하고 나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귓가에 들리는 음악 소리에 홀려 정신없이 춤을 추는 게 인간이다. 이처럼 전통적 경제학이 받아들이는 합리성의 전제를 뒤엎는 경제주체들의 비합리성이 소위 ‘경제위기 10년 주기설’을 설득력있게 보이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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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대형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의 붕괴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정확히 10년째를 맞은 2018년. 또 한 번의 경제위기 발발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발간된 ‘글로벌 금융안정 보고서(GFSR)’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은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통화부양 기조를 거둬 들이면서 금융여건이 타이트해지고 있고 이는 금융시장이 가진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다”며 “결국 이런 취약성은 자칫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실제 파키스탄, 아르헨티나, 터키 등이 국제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상황까지 내몰렸고,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지속적 기준금리 인상에 미국과의 무역전쟁 충격까지 가해진 중국 등지에서는 실물경제 위축과 통화가치 하락에 따른 자본유출 우려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28회 SRE에서 시장 전문가들이 꼽은 향후 경제위기를 촉발시킬 원인은 분분했다. ‘가계대출 증가와 부동산시장’이 가장 많은 48표를 얻었지만, ‘신흥국 경제 불안’(45표), ‘미국발(發) 보호무역주의’(44표), ‘중앙은행 긴축기조 돌입’(36표) 등도 그 못지 않게 많은 표를 얻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보호무역주의를 제외한 나머지 원인들은 전문가들이 금융위기 10년간 일어난 변화로 가장 많은 93표를 얻은 ‘유동성(대출) 확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그 만큼 여러 원인들이 난맥상처럼 꼬여 또 한번의 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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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대출 증가와 부동산시장’ 문제는 레버리징(leveraging)의 결과물이다.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 연준은 물론 유럽중앙은행(ECB), 영란은행(BOE), 일본은행(BOJ) 등은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인하하는데 그치지 않고 양적완화(QE)라는 이름으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돈을 시중에 풀어댔고 이는 세계 경제를 빚더미 위에 앉게 만들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올 3월말 현재 전세계 총부채는 사상 최대인 247조달러에 이른다. 10년전인 2008년 172조달러에 비해 75조달러나 불어난 셈이다. 연준의 돈 풀기에 달러화가 장기 약세로 가자 신흥국들은 값싼 달러로 외화부채도 마구 일으켰다. 이는 기준금리 인상과 달러화 강세에 직격탄을 맞을 수 있는 리스크다.
불어난 유동성이 흘러 들면서 부동산시장도 뜨거워졌다. 글로벌 컨설팅사인 맥킨지는 “미국과 중국, 호주 등지의 부동산시장은 역사적 신고가를 찍고 있다”며 2008년 위기를 불러온 부동산 거품이 다시 글로벌 경제에 끼고 있다고 경고했다. 불패신화를 써온 런던과 뉴욕 맨해튼 집값이 최근 5분기, 3분기째 하락하고 있는 것이 불안의 전조다.
‘신흥국 경제 불안’은 ‘중앙은행 긴축기조 돌입’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올들어 이미 세 차례 기준금리를 인상한 연준은 다음달 한 차례 더 금리를 인상한 뒤 내년에도 2~4차례 추가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연준의 통화긴축이 신흥국에서의 ‘머니 엑소더스(Money Exodus)’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외환을 비롯한 자본시장의 안정적 관리가 각 신흥국에 숙제로 주어져 있다. IMF가 가정한 연준의 가장 공격적인 금리 인상 시나리오 하에서 신흥국 자본유출액은 국내총생산(GDP)의 0.6%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위기가 잉태한 자국우선주의, 거대한 불확실성
이런 점에서 미 연준과 BOE 외에 다른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언제, 어떤 강도로 통화 긴축에 나설 지도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올해말 양적완화를 끝내는 ECB가 내년중 기준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들 것으로 점쳐지는 가운데 BOJ도 기준금리 인상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장기금리 목표치를 조정하는 등 스텔스식 테이퍼링(tapering)을 시작한 만큼 내년중 양적완화를 일단락할 확률이 높아 보인다. 유로존과 일본 등의 통화긴축 동참이 달러화 강세 압력을 낮춰줄 수 있다는 점은 그나마 위안거리다.
끝으로 미국에서 시작된 보호무역주의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지는 가늠조차 하기 힘든 불확실성이다. 따지고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들고 나온 보호무역주의의 구호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도 10년 전 금융위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 세계에 불어닥친 금융위기로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소득계층간 불평등이 심화되고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자국 우선주의가 득세하게 됐다.
이 같은 맥락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는 그 충격이 미치는 다른 교역 상대국에서도 동일한 대응을 야기할 수 있고, 이는 현재의 미·중간 무역전쟁과 같은 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 ‘미국의 관세폭탄→교역 상대국의 보복관세→국제 교역 및 글로벌 경제 위축’이라는 악순환이 재현되면서 과거 1930년대 글로벌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또다시 닥칠 수 있다는 우려도 과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