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남설악에서 만나다

화려한 암봉과 철 따라 피는 야생화들
  • 등록 2009-09-24 오전 11:43:00

    수정 2009-09-24 오전 11:43:00

[조선일보 제공] 비가 심하게 내릴 때면 호우주의보나 경보가 발령된다. 이것은 바람이나 먼지, 폭설, 그리고 한파에도 적용된다. 그런데 이런 격식 차린 말보다 요즘은 게릴라성 호우나 물폭탄이란 용어가 피부에 와 닿는다. 예측을 무색케 하는 기후를 한마디로 대변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새롭게 늘어나는 용어만큼이나 세상은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장수대를 떠날 때 드디어 비는 소강상태를 보였다. 눅눅한 기운이 사라지고 청명한 하늘이 보이니 더 바랄 게 없다. 그 순간 행복이란 참 단순한 데 있다는 걸 깨닫는다.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철따라 추억이 쌓여 있는 곳. 그런 남설악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 중세의 고성을 연상케 하는 첨예한 침봉

근년에 내린 집중호우가 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간 뒤로 갈 엄두가 나지 않은 탓이다. 한계령 너머 주전골은 이제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장수대의 아름다운 솔밭에서 아영하던 낭만도 전설이 되어 갈 터이다. 그 자리를 가득 메운 돌무더기를 보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 준엄한 자연의 섭리를 본다. 마치 환자를 만나듯 그 앞에 서지만 설레는 마음이 없지 않다. 설악산은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사람을 끌어들이고 있다.

아름다운 산을 말하는 대명사로 설악산만 한 곳이 있을까. 금강산이 한반도를 대표하는 알려진 산이었다면 설악산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나 제대로 알려질 만큼이나 은자의 산이었다. 1930년대에 절집이 있는 외설악과 내설악은 등산이 이루어졌으나 천불동계곡만 해도 1955년에 초등이 되었고 십이선녀탕과 서북주능선은 1959년에, 그리고 공룡능선은 그 이후에 길이 열렸다. 산악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봉우리와 계곡의 명명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설악’과 ‘한계’ 라는 명칭엔 내력이 있다. 양양 사람들이 설악산이라 부를 때 인제 내륙지역 사람들은 한계산이라 했다. 한계령의 이름은 원래 ‘소동라령’이었다. 따져 보면 의미가 분분하지만 어감만으로도 옛 사람들이 언어를 선택한 탁월함이 느껴진다. 소동라는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등장하지만 조선시대 말엽 <택리지> <대동여지도> 등에서는 오색령이란 이름이 출현한다.

▲ 무성하게 자란 풀섶에 여름 꽃이 자라고 있다.

인제 내륙에선 ‘한계산’이라 불려

<동국여지승람>은 “한계령 일대의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고 했다. 택리지를 통해서도 양반 사대부들은 험해서 다니지 않고 민초들이 한계령 오솔길을 통해 백두대간을 넘나든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역사서 <고려사>엔 한반도로 진격해온 몽고군이 철원, 춘천,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넘어온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맏아들인 마의태자가 머물렀다는 한계산성에 대궐 터가 있다는 기록으로도 이름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겠다.

한계령은 설악산을 넘는 가장 가까운 통로였지만 여전히 높고 험한 점이 문제였다. 그래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 바로 미시령이었다. 한계령 도로는 1968년에 착공해 1971년에 완공되었다. 1980년대까지도 원통에서 백담사로 가는 갈림길은 일방통행이었고 내설악은 물론 남설악에 이르는 길 역시 험로였다. 그러나 결국 설악산을 넘어 속초로 가는 최단 경로는 미시령에 뚫린 터널이 되고 말았다.

▲ 에델바이스로 불리는 귀한 꽃 솜다리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점봉산, 서쪽엔 가리산이 설악산과 대척을 이룬다. 모두가 훌륭한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설악의 명성에 줄곧 가려져온 산이다.

산에 빠져드는 과정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산악인들에게 설악산의 의미는 남다르다.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처럼 산도 다양하게 오르는 것이 필요하다면 이제껏 나의 산행 습관은 편식에 가까운 편이었다. 설악인가 아닌가 하는 이분법적 기준이 이 편향적 습관을 만들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걷는 산행을 하며 그걸 알았다. 정상으로 오르는 수직적 산행에서 수평적 패턴으로의 변화. 산은 그렇게 사람을 순화시키고 있다.

▲ 힘찬 기운으로 솟아오른 남설악의 기이한 바위.

대승폭포·십이선녀탕 등도 볼거리

대승령이 가까워지자 이마에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땀의 절반은 간밤에 마신 술로 여겨지지만 오름길이 끝나는 마당이니 힘들지 않다. 먼 산이 바라다 보이는 사실에 감사하며 능선에 섰다. 남설악의 첨예한 봉우리와 서북주능선 끝으로 절집 큰 스님처럼 물러앉아 있는 대청봉이 보였다. 서쪽 방향으로 남설악의 보루인 안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한동안 그 기이하고도 장대한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힘들게 메고 온 카메라는 꺼내지도 못하다가 풀숲에 핀 앙증맞은 여름꽃에 비로소 눈을 맞춘다. 적막감이 흐르는 절벽에도 하얀 꽃이 듬성듬성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게 바로 에델바이스였다. 양지 바른 절벽에 피는 꽃, 솜다리라는 예쁜 이름을 지닌 산악인의 상징, 그 꽃을 남설악에서 만났다. 언제나 무거운 짐을 메고 가며 보았던 공룡능선이나 천화대의 솜다리와는 다른 감흥이 일었다. 눈처럼 희고 갸름하거나 잿빛이 감도는 도톰한 두 가지 모양에서 같은 꽃이지만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 ‘동고서저’와 다르게 남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남설악의 지형.

마크로 렌즈를 삼각대에 고정하고 보니 흔들림이 끊이지 않는다. 꽃이 너무 작은 탓이다. 호흡을 멈추고 셔터를 누르며 에델바이스의 고고함을 관찰한다. 참으로 뜻밖의 만남이자 오늘의 보람이다. 즐거움이란 물폭탄처럼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십이선녀탕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늦긴 했지만 되돌아가는 걸음이 가볍다. 도중에 해가 저문다 해도 걱정스럽지 않은 기분 좋은 날이다.

▲ 양지바른 절벽에 솜다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남설악 촬영 가이드


남설악은 안산에서 귀때기청봉을 지나 대청봉에 이르는 긴 서북릉이 그 등뼈를 이룬다. 한국의 3대 폭포로 꼽는 대승폭포를 비롯해 소승폭포, 독주폭포, 설악폭포 등이 있으며 내외설악에 비해 짧지만 깊은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남설악의 촬영 요소는 오색약수 주변의 화려한 암봉과 상투바위골과 도둑바위골을 비롯해 대승령과 안산 사이의 침봉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곳들은 접근이 용이치 않은 것이 어려운 점이다.

안개와 구름을 보려면 능선에 머무를 만한 조건이 없어 장수대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능한 방법이다. 안산 주변의 기이한 풍광과 더불어 철따라 피는 야생화도 촬영 요소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특히 점점 더 귀한 꽃이 되어가는 에델바이스도 흥미있는 대상이 된다. 에델바이스는 크기가 작아 삼각대가 필요하다. 대체로 절벽에 피는 꽃이므로 안전에 유의해야 하며 채취하거나 훼손은 금물이다. 남설악 촬영에 필요한 렌즈는 20mm 전후의 광각렌즈와 접사렌즈가 유효하다.

남설악 가는 길
서울에서 남설악으로 가는 길은 양평, 홍천, 인제, 원통을 거쳐 44번 국도를 타고 장수대로 접어든다. 남설악은 장수대에서 한계령 넘어 오색약수 일원을 가리키는 것이 목적지 둘 중 한 곳이 될 수 있다. 대체로 외길로 이어지는 44번 국도는 인제까지 상당부분 4차선으로 고속화해 시간이 많이 단축된다. 서울시 경계에서 2시간30분 정도면 남설악 장수대에 도달할 수 있다.

/ 글·사진 손재식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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