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디트로이트의 쇠락

크라이슬러, 파산보호신청으로 공장 문닫아
GM 폰티악 브랜드 퇴출..폰티악市 활기 사라진지 오래
크라이슬러 파산보호 오히려 `잘됐다` 반응도
  • 등록 2009-05-11 오전 11:00:00

    수정 2009-05-12 오후 12:17:21

[뉴욕=이데일리 지영한특파원] 지난 5일 찾아간 크라이슬러 워렌 트럭 공장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미국 TV의 배경화면에 곧잘 등장하던 정문의 회전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 굳게 닫힌 워렌 트럭 공장. 현수막 자동차는 이 곳에서 생산되는 픽업트럭 닷지 램.
인기척이 들려 안을 들여다보니 경비원 혼자서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없냐고 물었더니 지난달 27일부터 가동이 중단돼 앞으로 두달 뒤에나 문을 연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크라이슬러는 채권단과의 부채탕감 협상이 성사되지 않자 지난달 30일 파산보호(챕터 11)를 신청했다. 닷지 램과 닷지 다코다 등 픽업트럭을 생산하는 워렌 트럭 공장은 파산보호를 신청하기도 전에 가동이 중단된 셈이다. 

공장이 문닫자 길건너 치킨가게와 편의점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워렌공장이 잘 나갈 때는 2700명의 근로자가 하루 3교대로 근무했지만, 석달전 2교대로 줄었고 한달전에는 종업원수가 1교대 700명으로 급감한 상황에서 공장문까지 닫혔기 때문이다.   

▲ 치킨가게 종업원인 조(Joe)는 매상이 크게 줄었다고 울상을 지었다.
공장이 가동을 중단하기전에는 하루 평균 200명 안팎의 공장 근로자들이 편의점의 물건을 팔아줬지만, 지금은 인근 주민들만 40~50명 찾아오고 있다. 

조(Joe·사진)라고 밝힌 치킨가게 종업원은 "3년간 이 곳에서 일을 해왔지만 지금처럼 타격이 심한 적은 없었다"며 "다른 일을 찾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편의점 직원인 로드(Rod)씨도 "언제 잘릴지 몰라 지금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며 한숨을 지었다.

◇ 폰티악市는 활기 잃은지 오래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에서 1번 도로인 우드워드 애브뉴를 타고 50분쯤 달리자 텅빈 폰티악시(市)가 나타났다. 제너럴 모터스(GM)의 폰티악 브랜드가 생산되는 이 곳 역시 디트로이트의 쇠락을 확인할 수 있었다.

GM은 지난달 27일 판매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폰티악 브랜드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생산을 단계적으로 축소해 내년말까지는 가동을 완전히 중단하겠다는 입장이다.

1926년부터 생산이 이루어진 폰티악은 60,70년대만 해도 힘좋고 스포티한 머슬카(muscle car)의 대명사로 젊은층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GM 산하 브랜드중 경쟁력이 가장 떨어지고 손실만 키우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특히 최근 수년간 수요부진에 따른 생산감축으로 직장을 잃은 근로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하나둘씩 폰티악시를 떠났고, 향후 1~2년간 폰티악시의 `엑소더스`가 절정에 이를 전망이다. 
 
그래선지 폰티악시는 활기를 잃은지 오래된 듯 싶었다. 다운타운은 텅비었고, 과거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상점들은 폐점한 곳이 많았다.세일이나 렌트로 내놓은 건물들이 즐비했고, 1층 상가 전체가 비어있는 곳도 있었다.
 
▲ 폰티악市의 텅빈 다운타운 거리..세일과 렌트로 나온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샌드라(Sandra)라고 이름을 밝힌 흑인여성 주차단속원은 "사람들이 폰티악을 떠나기 시작한지 오래됐다"며 "어디로들 가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서도 계속해서 떠나가고 있다"며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 실업자가 넘쳐나는 자동차 메카

미시간주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메카로 불려왔다. GM 본사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시 중심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가운데 이 곳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 크라이슬러 본사가, 서쪽으로 30분 거리에 포드 본사가 각각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 미국 자동차산업이 크게 위축되면서 미시간주는 미국에서 실업률이 가장 높은 곳이란 불명예를 안게 됐다. 특히 미국의 전국 평균 실업률이 4월말 기준으로 8.9%를 기록한 가운데 티트로이트의 실업률은 무려 20% 안팎에 달하고 있다.

▲ 디트로이트 시내 곳곳은 슬럼가로 변해 있었다. UAW 맞은편의 낡은 건물들은 디트로이트의 오늘을 잘 대변한다.
김택용 미시간주 주지사 자문위원(현 주간미시간 발행인)은 "자동차산업이 호황이던 70년대만해도 미국에서 이 곳 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산 자동차들이 밀고 들어오면서 디트로이트 경기가 10년전부터 꺾이기 시작했고, 경제위기가 발생한 최근 2년간 급속히 망가졌다는 설명이다. 

기자가 디트로이트를 방문한 날 디트로이트에선 마침 시장 보궐 선거가 치러지고 있었다. 선거 결과 60년대 피츠버그 농구선수 출신으로 종업원이 500명이나 되는 자동차 부품회사 사장인 데이브 빙(65)이 당선됐다. 

당선이 유력해 보였던 캔 카크럴 쥬니어 시장 대행은 부패로 물러난 전임 시장을 염두에 두고 `정치 개혁`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지만 고배를 마셨다. 빙이 부품사를 운용한 경험으로 디트로이트 경제를 살리겠다고 호소한 점이 먹혀들었다.
 
특히 카크럴 후보의 경우 자동차 노조의 지지를 받았지만 예상밖의 패배를 당했다. 투표율이 15%로 워낙 낮았지만, 일각에선 디트로이트 유권자들이 `정치` 이슈를 앞세운 카크럴 보다는 `경제`를 내세운 빙을 선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디트로이트 시장선거에도 `정치보다는 경제`

크라이슬러가 파산보호를 신청하고 GM의 자구노력 데드라인이 임박함에 따라 디트로이트의 부품업체들이 크게 긴장하고 있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의 부품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단기적으로 납품대금을 떼일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지만, 그보다는 향후 GM과 크라이슬러의 구조조정에 따른 매출감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크라이슬러 본사(사진위)와 GM 본사. 옆으로 기운 사인보드 마냥 크라이슬러의 사세도 크게 기울었다.
KOTRA에 따르면 미시간 현지에 진출한 한국 부품사는 48곳이고 이중 23곳이 크라이슬러와 납품중이고 크라이슬러 미수채권은 5500만달러 안팎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중 자동차방진제품을 크라이슬러에 납품하는 DTR의 경우엔 크라이슬러가 파산보호에 들어가면서 40여일치의 납품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는 크라이슬러 매출비중이 60%에 달한다.

황덕환 DTR 이사는 "일이 잘 풀릴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크라이슬러가 파산보호로 가지 않을 것으로 봤는데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부품업계 관계자들은 외국 업체들이 목소리를 크게 내기가 쉽지 않다고 전하고 있다. 나중의 거래를 위해서라도 미운털이 박힐까하는 노파심도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본계 납품사들의 경우엔 개별적인 대응을 자제하고, 일본 정부가 대신 나서 미 정부에 매출채권에 대한 보증을 요구하기도 했다.  

크라이슬러는 부품사들이 동요하자 대금은 꼭 지불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최근 주요 벤더들에게 발송했다. 자구노력 데드라인이 임박한 GM의 부품사들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보 앤더슨 GM 구매총괄 부사장은 5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GM이 지금껏 납품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며 걱정하지말 것을 당부했다.

◇ 미 자동차산업 생존하겠지만 옛 명성 회복 쉽지 않다 

그러나 이번 위기가 지나면 미국의 자동차산업에는 큰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의 자동차 평론가로 CBS 라디오에 고정 출연하고 있는 존 맥클로이는 "미국 자동차 산업은 생존하겠지만, 침체에서 벗어나면 이전보다는 작은 메이커로 변신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납품업체들도 크게 감소할 것이란 전망이다.

맥클로이는 미국 메이커들은 퇴직자의료보험과 펜션 등 레거시 코스트는 물론이고 높은 임금수준, 과잉생산능력, 딜러과잉 등 문제가 산적해있었다고 지적했다. 이런 와중에 글로벌 시장 침체에 따른 신차 판매 급감으로 디트로이트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설명이다.

크라이슬러 실직자인 존 람니씨는 화살을 경영진에 돌렸다. "미국 기업들이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했고, 그동안 실리를 무시하고 덩치만 너무 키웠기 때문에 타격도 심하게 받았다"는 분석이다.

람니씨는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에서 가까운 콘너(Conner) 엔진 조립공장에서 12년간 일하다가 작년 11월부터 일시해고(lay off) 상태에 놓여있다. 그는 "일을 놓게 되니 무료하면서도 미래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든다"며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다시 오면 회사로 돌아가고 싶다"며 크라이슬러 정상화에 강한 기대감을 피력했다. 

막상 크라이슬러가 파산보호를 신청하자 디트로이트 일각에선 오히려 잘된 것이 아니냐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지금의 상태를 질질 끌어봤자 회사가 청산될 수 밖에 없는 만큼 오히려 환부를 드러내는 수술(챕터 11)을 통해 회생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 오글레스비씨의 두자녀도 최근 직장을 잃었다. 멀리 UAW 건물이 보인다.

디트로이트시 전미자동차노조(UAW) 건물 앞에서 만난  퇴직 근로자인 에이모스 오글레스비씨도 앞으로 잘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올해 61세인 오글레스비씨는 10년전 크라이슬러 워렌 스탬핑(Warren Stamping) 공장에서 퇴직해 지금은 연금으로 별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자동차산업이 위기를 맞으면서 2명의 자녀가 직장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디트로이트의 쇠락을 부채질한 외국 메이커들이 원망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오히려 일본차들이 연비가 좋기 때문에 미국차보다 많이 팔린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미국 자동차산업이 반드시 컴백할 것"이란 기대감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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