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재판 참관기)①이건희 전회장에 대한 추억

베이징 발언 이후 은둔의 이미지 굳어져
영국 윈야드 공장 준공때 첫 인사 나눠
  • 등록 2008-07-04 오전 10:08:03

    수정 2008-07-04 오전 10:59:26

[이데일리 이의철 논설위원] 2008년 7월 1일. 이건희 전회장 등 삼성그룹 관련 제 6차 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피고인석에는 이건희 전회장을 비롯해, 현명관 이학수 김인주 유석렬 김홍기 등 삼성 전현직 경영진들이 앉아 있었다. 증인으로는 이재용 전무, 김상조 교수, 최학래 전 한겨레신문사장 등이 출석했다. 방청객중에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비롯해 이윤우 배동만 김순택 등 삼성계열사의 주요 CEO 들이 자리를 지켰다.

이날은 기자가 논설위원으로 발령받은 첫 날이기도 하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두려움과 함께 의욕도 충만했음을 밝혀둔다.

이날 재판은 김홍기 전 삼성SDS사장에 대한 피고인 심문에서 시작해 이재용전무에 대한 증인 심문, 이학수 김인주에 대한 피고인 심문, 마지막으로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한 피고인 심문의 순으로 진행됐다.

기자가 지금부터 쓰려는 것은 재판을 통해 본 이건희 전 회장의 경영관과 철학이다. 사실 기자는 이 전회장을 속속들이 잘 모른다. 잘 모르면서 뭘 쓰려고 하냐고 비판하면 할 말이 없다. (하기야 같은 집에서 사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모를 때가 많다.)

기자가 이 전회장을 직접 만난 횟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하다. 주니어 기자 때 삼성그룹을 수년간 출입했지만, 출입 내내 추진했던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했다. 차를 한잔 마실 기회도 없었다. 그렇지만 가까이서 인사를 하거나 짧게 대화를 한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이 전회장에 대한 책도 꽤 읽었고, 그가 직접 집필했다는 에세이도 수차례 통독했다. 삼성을 출입했던 기자시절부터 삼성이나 자연인 이건희에 대한 편견 없이 균형감각 있게 그를 보려고 노력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로 통한다. 대중이나 직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고사하고, 미디어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사람은 말이나 글을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회장의 말이나 글은 중간과정에서 ‘편집’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가감 없이 한말이 그대로 보도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 회장의 발언이 가장 적나라하게 전달된 것은 95년 4월 베이징 특파원들과의 간담회 과정에서 나온 이른바 ‘베이징발언’이다. 흔히 베이징 발언은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로 압축된다. 이 회장의 발언 요지는 “행정규제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 한국의 경쟁력은 없다. 나라가 잘 되려면 국민 정부 기업이 3위 일체가 돼야 한다는 것”(김순택 당시 비서실 부사장)이었으나 청와대가 이 발언에 발끈하며 경위를 조사했고, 이를 보도했던 미디어들도 “정치는 4류”라는 감각적 단어에 집착하면서 진의는 왜곡돼 버린다.

이 사건은 이건희 전회장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베이징 발언 파문은 이후 “이건희 회장이 대외적으로 말을 조심하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서실에서 회장과 미디어의 직접적 만남을 통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현명관 전 비서실장)

베이징 발언 이후에도 이건희 전 회장의 여러 발언과 경영철학은 삼성내 교육자료로, 베스트셀러화된 서적으로, 심지어는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문건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여전히 ‘편집’된 발언이라는 한계를 벗지 못한다.

이건희 회장이 대중에서 멀어지는 것에 비례해 역설적으로 뉴스메이커로서 그의 파워는 커졌다. 흔히 기자들은 인물들의 뉴스 밸류를 따져 취재 여부를 결정하는 데, 이 전 회장은 언제 어디서건 뉴스가 되는, 또는 그림이 되는(방송기자 입장에선)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뉴스의 초점이 됐다.

“검사님이 원망스럽습니다”(노태우비자금사건 당시 재판정에서) “한국은 중국과 일본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될 수 있다”(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며) “제가 다 책임지고 가겠습니다”(삼성비자금 관련 특별검사 소환 당시)와 같은 이 전회장의 발언들은 대부분 신문지상의 1면을 장식했다.

기자가 이 전회장을 가까이서 처음 본 것은 삼성전자가 영국 윈야드에 공장을 건설하고, 그 준공식에 이 전회장이 참석했을 때다. 지금은 철수했지만 당시 삼성의 윈야드 공장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일자리에 목을 매던 영국 정부는 삼성의 투자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기자는 취재기자 자격으로 현장에 있었는데, 운좋게도 이건희 회장과 악수를 할 기회가 있었다. 회장 전담경호원과 기자 마크맨들이 있었는데, 빈 공간을 파고들어 이 회장에게 접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자가 잡아본 이 전회장의 손은 힘있고, 두터웠다.

기자는 개인적으로 악수하면서 상대방의 성격이나 특징을 파악해보는 습관이 있다. 손에 힘을 주지 않고 악수하는 사람은 별로 느낌이 좋지 않다.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다. 반대로 손에 힘이 있는 사람은 진실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손이 아플 정도로 쥐는 것도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각설하고 이 회장의 손 힘은 적절했다. 악수를 하면서 “OO신문 이의철 기잡니다”라고 인사를 하니, 이 회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기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옆에 서 있던 황영기 당시 삼성전자 상무가 “삼성을 출입하는 기잡니다”라고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이 회장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행사장으로 향했다. 이 회장에 대한 첫 인상은 “눈빛이 살아있다”, “사려깊다” 였고, 뭔가 알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물론 기자들은 권위에 주눅들지 않게끔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다지 위축됐던 기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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