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시댁에 조각난 마음 곱게 바느질해요”

한땀 한땀 뜨다 보면 마음이 차분… ‘바느질 명상’
  • 등록 2006-11-10 오후 12:01:00

    수정 2006-11-10 오전 11:03:56

[조선일보 제공] 가느다란 은빛 바늘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린다. 한 줌 양모 털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는 듯하더니, 밋밋했던 실크 머플러에 꽃·별·달 문양이 사뿐 내려앉는다.

은빛 바늘의 마법? 아니, 요즘 엄마들 사이 대유행인 양모 펠트 작업의 일부다. 양모 털을 ‘뜯어’ 섬유(부직포)를 만드는 법, 꿰매는 대신 찔러 덧대는 기술 등 몇 가지 간단한 펠팅 기법만 배우면 초보생도 1시간 안에 베레모, 파우치, 스카프, 코사지, 토드백까지 완성할 수 있다. 펠트뿐 아니다.

퀼트에서 진화한 ‘크레이지 퀼트’를 비롯해 유기농 바느질, 돌아온 십자수까지. ‘건강과 환경’ 두 마리 토끼를 쫓는 로하스(LOHAS)족의 트렌드? 분명한 건 알뜰주부 혹은 현모양처의 취미 수준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늘로 명상하고, 수다떨고 
 
“내일이 바느질 모임 하는 날이다 생각하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바느질 수다 떨며 스트레스 해소하는 맛,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조각보 짓는 일은 제게 명상이자 퍼포먼스예요. 조각조각을 이어가며 흩어진 내 마음, 상처나고 딱지 진 내 마음을 곱게 탄생시키죠” 바느질 커뮤니티에 올라있는 글들. 일러스트레이터 조인숙씨<사진 가운데>도 비슷하다. 그림 작업이 힘들고 지루해지면 바느질감을 집어든다. 민소(6)를 낳고 나서 재봉틀 바느질에 재미를 붙였는데, 요즘은 머리를 맑게 하고 싶거나 조용히 명상하고 싶을 때 재봉틀 앞에 앉는다. “정형화되지 않아서 좋아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민소의 낙서를 모아놨다가 옷감에 먹지를 대고 본을 떠서 가방 만들 때 장식으로 달고, 옷에도 그려 넣어요.”

엄마가 바느질을 하면서 민소도 달라졌다. 수줍음 많던 아이가 그림으로 자기 생각을 적극 표현한다. 무심코 한 낙서를 가지고 엄마가 가방을 만들어주자 기가 바짝 살아서는, “우리 엄마가 만들어줬어요. 가방 속에 주머니가 이렇게 많아요” 하면서 동네 자랑을 하고 다닌다.

▲ “내 이름은 민소. 원피스랑 모자는 엄마가 만들어주셨죠."

미운 남편 생각하며 ‘펠팅’하기
 
양모 펠트 마니아들도 마찬가지. ‘핸드메이드 양모펠트’의 저자인 김희진씨가 지난해 오픈한 ‘펠트하우스’(felthouse.co.kr)카페 회원만 무려 4000여 명이다. 서울 청담동 등 전국 매장으로 펠트를 배우러 오는 여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배치된 강사만 수십명.

김씨는 펠트 인구를 2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옷감을 직접 만든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죠. 퀼트나 뜨개질과 달리 기본 펠팅 기법만 알면 빠른 시간 안에 물건을 완성할 수 있어서 성미 급한 엄마들이 좋아해요.”

네 살짜리 아들을 둔 유재경씨는 “저를 비롯해 거의 매일 펠트하우스에 오는 주부들은 반(半)중독자”라며 웃는다. “펠트가 바늘로 옷감을 찔러가면서 하는 작업이라 스트레스가 많이 풀리거든요. 농담반 진담반으로 미운 남편, 시댁식구들 생각하면서 펠팅한다는 분들도 많아요.”

▲ 미키 인형부터 모자까지 모두 펠트 소품으로 단장한 일곱 살 다정이. 펠팅 기법을 활용한 물건은 솔기없이 완성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즐거움
 
이혜원씨가 운영하는 재활용공작소 다시(cafe.naver.com/ddasi.cafe)에는 시집 안간 직장여성부터 40대 주부들까지 구성원이 다양하다.

이 커뮤니티의 특징은 말 그대로 DIY바느질 마니아들이 모였다는 것, 그리고 손바느질만 고집한다는 것이다. 물에 빨아 줄어든 스웨터, 팔꿈치에 구멍 난 셔츠, 싫증난 청바지, 얼룩이 진 티셔츠들로 전혀 새로운 핸드메이드 물건을 만들어낸다.

“2주에 한번 정모(정기모임)를 하는데 각종 아이디어가 속출해요. 면주름치마의 경우 허리는 잘라 헤어밴드로, 폭은 그대로 잘라 가방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고요, 청바지 시접으로 링 모양 귀고리를 만드는 사람도 있죠.” 지난 9월엔 전시도 열었다. “느리게 산다는 것, 버려진 걸 살려내는 기쁨, 나도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장 큰 매력이죠.”

바느질이 슈퍼맘이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크나큰 오해! “박음질만 할 줄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단다. “돈도 별로 안 들어요. 옷감 외에 부속품을 구입해야 하는데, 동대문 시장에 가면 똑딱이 단추 100개에 5000원, 지퍼 하나에 500원, 리벳 한 쌍에 50원밖에 안 해요. 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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