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청탁은 반칙행위다. 이 같은 반칙행위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몸을 던져서라도 막겠다"
한상률 국세청장이 지난해 3월20일 국세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강조한 말입니다. 한 청장은 인사청탁성 뇌물로 낙마한 전군표 전 국세청장으로 인해 상처입은 조직 분위기를 쇄신해보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로부터 10개월이 채 안된 2009년 1월. 한 청장도 고가의 그림으로 인사청탁을 했다는 의혹에 휩싸이며 전군표 전 청장과 비슷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권 실세와 가까운 포항지역 유지들과 골프를 치고 대통령의 동서와 식사까지 했다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몸으로 인사청탁을 막겠다던 사람이 몸을 던져 인사청탁을 했다는 비아냥까지 나왔습니다.
한 청장은 결국 15일 저녁,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한때 유임까지 예상됐던 한 청장의 불명예 퇴진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국세청의 아름답지 못한 과거를 떠올립니다. 국세청은 기회있을 때마다 개혁을 부르짖고 투명세정을 강조해왔지만 구설수에 자주 올랐습니다. 세무비리는 잊을만 하면 터져나왔고, 인사 이후 들리는 불협화음은 언론보도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특히 전임 국세청장 가운데 상당수가 퇴임 후에도 좋지 못한 이유로 언론에 오르내리거나 당국의 사법처리를 받았습니다. 국세청이 재무부에서 분리된 후 15명의 청장이 나왔는데 이중 6명이 사법처리 되고 1명이 불명예 퇴진했습니다.
전 전청장의 전임인 이주성 전 청장은 프라임 그룹의 대우건설 인수 청탁 금품수수 혐의로 2008년 11월 구속됐습니다. 12대 안정남 청장은 부동산 투기의혹으로 퇴진했고, 2003년에는 손영래 전 청장이, 1998년에는 임채주 전 청장이 구속됐습니다.
국세청장은 검찰총장, 경찰총장, 국가정보원장과 함께 4대 권력기관장으로 분류됩니다. 한해 150조원의 국세를 거둬들이는 자리인만큼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지만, 역대 국세청장들은 그같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국세청에 과세권을 주고 자신들의 재산권리에 대한 간섭 권한을 맡긴 국민들이 분노와 실소를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 청장이 물러났다고 해서 관련 의혹들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서는 곤란합니다. 인사로비를 둘러싼 의혹을 걷어내고 실체적 진실을 가려내야 합니다. 철저한 검증작업을 통해 반드시 진실을 규명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숨김없이 밝히는 것이 순서입니다. 누군가의 실수와 오해로 치부해 이번 일을 유야무야 한다면, 이미 금이 가버린 국세청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메울 길이 없습니다.
일이 터질때 마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국세청이라는 특수한 조직의 체질 개선도 필요해 보입니다.
외부인사 수혈은 능사가 아닙니다. 국세청 같이 내부 논리가 강한 조직에 외부인사는 일시적, 단기적으로 분위기 쇄신에는 도움이 될 지 몰라도, 어차피 `다른 식구`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국세청 조직을 실질적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병이 깊다고 해서 무작정 메스를 들이대면 설령 병이 낫는다 해도 크게 흉터가 남고 후유증도 오래 갑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씩 차도가 있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실효성 있어 보입니다.
우선은 국세청장을 둘러싼 논란이 `인사`에서 출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사청탁 자체가 어려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국세청에서 생기는 분란의 소지를 줄일 수 있습니다.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실력, 능력에 따라 인사조치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울러 뇌물을 통한 청탁에 대한 처벌 수위를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관련 범죄에 대한 형량이 높아지고 벌금이 올라가면 위험부담도 커지고, 그러면 오고가는 뒷 돈 규모도 커집니다. 높은 위험을 감수하고 잘못을 저지르기 보다는, 정당한 평가를 통해 올바른 보직을 받는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병이 깊고 클수록 근본 원인을 짚어봐야 합니다.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환자의 의지`라는 사실을 국세청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름답게` 퇴장하는 청장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내부의 부정을 도려내는 자정의 칼을 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