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시장을 놓고 미국과 일본 유럽 각국이 벌이는 각축전도 뜨겁다. 일찌감치 `원조는 투자`라는 교훈을 체득했던 이들 국가들은 풍부한 원조자금을 앞세워 아시아 각국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아시아는 명실공히 원조전쟁, 세계 열강의 금융외교 격전지로 변모했다.
우리나라도 이 같은 국제 경제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對)아시아 경제협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금융외교력은 이제 미래 성장 동력을 준비하는데 빠져서는 안될 필수 과목이 됐다. 지난 20년간의 수업은 얼마나 알찼던가, 수업료를 아끼려다 우리의 `대외경제협력-금융외교`는 여전히 저학년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다음에서는 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우리나라의 동남아시아 경제협력사업을 돌아보고 그간의 성과와 향후 과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실장님. 우리나라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으로 최종 결정됐습니다." 2004년 4월7일 오후 수출입은행 경제협력1실. 한 통의 전화가 정적을 깬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범죄정보센터 개발사업`에 유상원조를 지원할 국가로 한국이 최종 결정됐다는 보고다.
"그래, 서 팀장. 고생 많았네" 그제서야 김 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네덜란드와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원조 계약건이라 끝까지 방심할 수 없었다.
개발도상국에 원조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놓고 세계 주요 선진국들이 "우리 돈을 써달라"며 숨막히는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선진국의 `러브콜`에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소위 `잘 나가는` 개도국은 오히려 당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개도국 원조사업을 놓고 선진국들이 치열한 금융외교전을 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2020만달러 규모의 인도네시아 `국가범죄정보센터 개발사업`은 지난 7월 최종 차관공여계약이 체결됐다. 이 사업은 인도네시아 경찰청 본청에 범죄정보 센터를 구축하고 31개 전국 지방 경찰청과 본청간 전산 시스템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다.
차관을 제공하는 국가의 기업이 이 사업을 수주한다. 따라서 한국 기업이 인도네시아 국가범죄정보센터의 골격을 세우게 됐다. 향후 후속사업을 수주할 가능성도 높다. 비슷한 사업을 아이템으로 주변국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했다.
이처럼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는 수혜국 뿐만 아니라 지원국 경제에도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주요 선진국들이 `원조 전쟁`이라 불릴 만큼 원조사업에 열을 올리는 것도 직·간접적인 경제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금융외교의 첨병
정부간 이뤄지는 `원조사업`, 나아가 민간부문에서 진행되는 `개도국에 대한 해외투자`에 이르기까지 그 성패는 금융외교력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수출입은행이 `대외경제협력-금융외교`의 최일선에 서 있다. 수출입은행은 국내기업에 수출자금과 보증을 지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정부로부터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위탁 받아, 개도국에 대한 원조사업을 심사·집행하고 사후관리한다. 또 해외 진출을 도모하는 기업 및 유전과 가스전 등 에너지자원개발에 뛰어든 민·관 업체를 측면 지원한다.
수출입은행이 수탁 관리하는 EDCF는 우리나라 대외 원조사업의 젖줄이다. 개도국의 경제발전을 돕고 경제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지난 1987년 설치됐다. 일반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개도국에 지원하는 공적개발원조(ODA)는 크게 유상원조와 무상원조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의 EDCF는 장기 저리로 제공되는 일종의 유상차관이다.
지난해말까지 EDCF를 통해 이뤄진 원조사업은 39개국 126개 사업에 걸쳐 2조2033억원(이하 승인기준)에 이른다. 지난해 한해 동안만 필리핀 라귄딩간 공항개발, 요르단 폐수처리설비 공급, 미얀마 전자정부 구축, 베트남 닌빈 고체폐기물처리, 인도네시아 국가범죄정보센터개발사업 등 12개국 13개 사업에 걸쳐 2748억원의 원조사업이 진행됐다.
신동규 수출입은행장(사진)은 "EDCF를 통한 이 같은 원조사업은 국가 이미지를 높이고, 개도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 수출시장을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수출입은행의 지원을 등에 업고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우리 기업도 늘고 있다. 현대미포조선소가 베트남에 세운 현대비나신조선소와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 위치한 CJ의 라이신·사료제조 공장 등이 대표적이다. 현지 지역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 기업은 지역사회와 끈끈한 유대를 쌓으며 동남아시아 경제협력의 민간사절로 활약중이다.
요즘처럼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에선 개도국으로부터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자원개발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 석유공사가 베트남 유전개발 사업에서 거둔 쾌거도 그간 수출입은행을 비롯한 우리정부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쌓아온 긴밀한 경제협력이 밑받침됐다.
◇경제협력 차관 10억 늘면 GDP 36억 증가
EDCF 원조사업과 수출입은행이 취급하는 수출자금대출이 한국경제에 기여하는 효과는 이미 학계의 계량화 작업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지난해 고려대학교 경제연구소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EDCF 차관을 매년 평균 10억원씩 증가시킬 경우 실질 GDP(국내총생산)는 연평균 36억원이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됐다.
(단위 : 억원)
EDCF 원조사업이 국내기업의 성장에 기여하는 바는 지난 2000년 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1월까지 한국기업과 구매계약이 체결된 EDCF 원조사업은 43건으로 원조액은 6억5490만달러였다.
수출입은행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43건 사업을 통해 국내기업이 실제 수주한 금액은 전체 차관공여금의 1.1배, 특히 상담이 진행중인 사업까지 포함하면 그 금액은 20억9300만달러에 달했다. 즉 차관 제공액의 3.2배에 달하는 수출유발효과를 낳은 것이다.
수출입은행의 신동규 행장은 "우리나라가 빌려준 돈으로 개도국 정부가 사업을 발주하고 그 사업을 다시 국내기업이 수주하게 되면 사실상 해당 원조자금의 대부분은 국내에 머무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국내 기업의 매출확대와 고용창출로 이어진다. 특히 EDCF를 통한 유상지원은 언젠가 돌려받는 돈인 만큼 결코 손해보는 사업이 아니다.
물론 이 같은 EDCF 원조의 목적이 눈앞의 이익을 좇는데 있지는 않다. 신 행장은 "궁극적으로 `한국`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아시아시장에 심어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우리나라와 수혜국 모두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2004년말 지역별 EDCF 지원실적 누계치>
개도국들이 한국의 EDCF를 경제개발의 동반자로 채택하도록 하기 위해선 개도국 정부와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는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오랜 교류를 통해 신뢰감이 구축될 때 비로소 그 위력을 발휘한다. 이를 위해 수출입은행은 틈틈이 개도국 상무관을 초청, 수출입은행 업무에 대한 설명회를 갖는다. 또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정부의 해외투자사업 담당 공무원을 매년 한국으로 초청해 워크숍을 열고 있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직후 주춤했던 EDCF 원조사업은 2000년 들어 다시 활기를 띠는 추세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예산을 통한 재원은 다른 경쟁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실정.
지난해말까지 정부가 EDCF에 출연한 자금은 6799억원. 7년전에 비해 2000억원 가량 늘어나는데 그쳤다. 이에 따라 재정융자차입금 이익잉여금 등을 합산한 EDCF 기금조성액은 지난해말 현재 1조6505억원에 불과하다. 이는 일본이 지난 2003년 한해 동안 집행한 공적개발원조(ODA) 9조원(89억1100만달러)의 20%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정책입안자들이 여전히 대외 경제협력 사업이 갖는 중요성, 특히 대(對)아시아 경협이 갖는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