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SPN 양승준기자] 입담 좋은 로맨티스트 감독 우디 알렌이 스필버그의 SF영화를 차기작으로 들고 나왔다면 혹 이런 기분이었을까?
유머와 낭만으로 점철된 영화 ‘금지옥엽’과 ‘첨밀밀’의 진가신 감독이 중국 무협 영화를 들고 나온다니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인터뷰 내내 진가신 감독 식 ‘멜로 영화’의 한 팬으로서 무협 영화 감독으로 변절한(?) 이유를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최근작으로 무협 영화 ‘명장’을 찍은 진가신 감독의 소신은 오히려 완고하고 당당했다. 자신은 멜로 영화를 졸업 때가 되었거니와 지금 영화 산업에서 ‘첨밀밀’ 같은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영화 제작자로서 사형 선고를 받는 일’과 다름 없다는 그였다. 관객들과 영화 투자사들이 대작 무협 영화가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그의 발언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결곡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영화적 발걸음을 시류 편승이 아닌 ‘생존적 문제’로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다음은 지난 22일 오후 서울 소공동 조선 호텔에서 있었던 90년대 로맨티스트 감독 진가신과의 격의 없던 인터뷰 일문일답이다.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힘들지는 않았나.
-내 이름이 가신인데, 이걸 한자로 풀면 ‘힘들어도 가능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크게 힘든 적은 없었던 것 같다.(웃음)
▲영화 ‘명장’은 기존 정통 무협극과 달리 영화톤이 흑백인데다 다소 거친 느낌까지 드는데.
-잘 보았다. 의도적으로 컴퓨터 편집시 색감을 톤 다운 시켰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를 봤을 때 관객으로 하여금 가슴을 조이는 ‘갑갑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 상 검은색은 더욱 검게, 흰색은 더욱 희게 하는 명암의 대비를 통해 좀 더 극적인 느낌을 주고자 했다.
▲이렇게 무채색으로 영화를 표현한 것은 좀 더 현실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인가.
-어느 정도 맞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난 영화에서 화면의 색감 뿐 아니라 배우들의 의상, 액션, 배우들의 캐릭터를 통해 무협극이지만 좀 더 리얼한 극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감독은 기존의 중국 무협극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기존의 중국 무협영화는 영화의 소재를 찾는 데 있어 중국 문학을 주로 이용하곤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적 현실 속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보다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소재에만 집중해온 게 사실이다.
이는 중국 영화가 아직 유교적인 특색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방증이기도 한데, 사실 유가에서 말하는 인간상은 절대 선 혹은 절대 악과 같이 현실과 맞지 않는 다소 비인간적이고 신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중국 무협 영화의 전형성을 깨고 싶었다.
-오롯이 리얼 스토리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영화 속 사건과 캐릭터는 중국 역사에 있었던 여러 인물들의 실제 사건을 모아 재구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요즘 홍콩 영화도 80년대 홍콩 느와르의 영광을 뒤로 한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가 마침 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정치적 맥락 속에 있기도 한데 이런 사회적 배경이 홍콩 영화의 영화 제작 환경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가.
-그런 정치적 상황과 홍콩 영화의 쇠퇴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홍콩 영화 산업이 부진한 이유가 영화의 질 보다는 홍콩영화가 시장을 잃어 버린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할리우드는 물론 전세계 영화시장은 점점 대작 위주의 영화와 비주류 인디 영화의 양극화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홍콩 시장은 이 세계적 영화 제작의 흐름을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또 블록버스터로 중무장한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 등 여러 국가에서 자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홍콩 영화는 시장에서 더욱 설 자리가 없어졌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 홍콩 영화의 주요 마켓이었던 한국과 대만을 잃은 대신 중국 대륙에서 홍콩 영화 수입에 대한 활로가 열리고 있어 그 부분은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금지옥엽’과 ‘첨밀밀’ 등 멜로 영화로 유명한데 무협 영화를 제작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이건 경제 문제와 관련이 깊다. 홍콩은 물론 세계의 전반적인 영화시장은 ‘대작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영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특히 홍콩에서는 무협과 대스타, 액션이란 요소가 갖춰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영화 제작에 투자를 안한다. 관객들이 외면하는 것은 물론이다. 지금 ‘첨밀밀’ 같은 영화를 만들면 아무도 영화에 투자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또 사람들은 멜로 영화는 꼭 극장에서 안봐도 DVD로 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래서 이런 대작 영화를 만들어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 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영화 제작 환경이 변했다고는 해도 시류만을 쫒다 보면 감독 자신의 영화적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유머’와 ‘낭만’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내가 무협 영화란 대작을 만든 것은 시류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이를 꼭 잊지 않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필모그래피에서 멜로 영화는 이미 졸업할 시기를 넘었다고 생각한다. 창작인은 한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소재, 장르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사이먼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이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만 계속 부른다면 과연 청자들이 좋아할까? 모든 예술인은 변해야 하고 나는 그것이 곳 진보의 첫 걸음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감독이 생각하는 ‘명장’이 기존 중국 무협과 비교되는 차이점을 이야기해 달라.
-‘명장’이 표면적으로는 중국 무협 액션을 따라 간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중국 무협과는 달리 ‘액션’보다는 극 중 캐릭터의 심리 묘사에 더 치중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감독을 20년간 했는데 이연걸 처럼 캐스팅 수락을 빨리 받아들인 배우도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이연걸은 내가 ‘명장’은 거짓 액션이 없고,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반전의 메시지를 담을 것이라고 하니 5분 만에 오케이했다. (웃음)
▲‘명장’을 보면 삼국지처럼 세 형제가 의기 투합하기도 하기도 형제간 한 여자를 둔 사랑도 들어가 있는 등 스토리가 좀 복잡한 것 같은데?
-내가 영화 속 캐릭터 구현에 중점을 두었던 것은 세상에는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라는 점이다. 영화 속 이연걸은 식량 때문에 항복해 온 적군 4천여명을 죽이는 잔인한 장수로 그려지지만 그의 냉혹함 속엔 항상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우국충정이 있었다. 이처럼 사람은 항상 양면적이고 복합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입체적인 캐릭터 만들기에 고심했다. 요즘 현실을 살아가는 사회인들이라면 이런 양면적 캐릭터에 더 공감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감독은 한국 배우 지진희와 함께 한 ‘퍼햅스 러브’도 그렇고, 한국 홍콩 태국의 합작 영화 ‘쓰리’에도 참여하는 등 영화의 ‘범아시아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혹 당신이 차기작을 만든다면 꼭 같이 해보고 싶은 한국 배우가 있는가?
-전도연과 함께 하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유명해져서 과연 내가 하자고 한다고 그녀가 수락할 지 걱정이다. 4~5년전 내가 한국에 왔을 때도 기자들이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도 내가 ‘내 마음 속의 풍금’과 ‘해피 엔드’의 전도연을 인상깊게 봤다고 했더니 다들 시큰 둥 해 하던데, 지금은 오히려 감독이라면 누구나 다 전도연과 작업하고 싶지 않느냐라고 물어 당황스럽기도 하고(웃음).
전도연을 사석에서 한 두번 만난 적이 있는데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에 립 글로즈만 발랐는데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아시아 필름 어워드에 이안의 ‘색,계’와 이창동의 ‘밀양’과 함께 작품상 후보에 올랐는데 소감은 어떤가?
-아직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보지 못해 아쉽지만 ‘박하사탕’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이연걸, 유덕화, 금성무 이 세 유명 배우를 콘트롤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한 명 한 명 만나면 괜찮은데 이 셋이 하도 같이 다녀 어려운 점도 있었다. 배우들은 다소 감성적인 부분이 있어 같이 있는 데 지적을 하면 배우의 자존심 문제도 있었고. 그래서 그 중 가장 친한 금성무한테 “야 좀 떨어져 다녀”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나중엔 한 명 한 명 핸드폰으로 연기지도를 하는 고육지책도 썼고(웃음)
▲한국 영화에 대한 감독의 생각을 듣고 싶다.
-한국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더 좋아하는 것은 한국 관객들이다. 나는 다양한 영화 장르를 소화하는 한국 관객들이 참으로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 관련기사 ◀
☞''바보'' ''허밍''...영화도 묵혀야 제맛?
☞주목 이 영화...''뜨거운 것이 좋아'', ''어린왕자''(VOD)
☞''우생순'' 개봉 1주만에 100만 관객 돌파...2008년 개봉작 중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