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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공간을 만들어 내는 벽과 바닥은 각 부분 고유의 열림·닫힘·높이·폭을 가지고 있고 이는 그 공간을 방문한 사람들의 행위의 배경이 된다. 미술관에 가면 미술품을 관람하기에 가장 좋은 폭의 벽이 설치돼 있고, 유치원에 가면 단차 없는 바닥과 낮은 계단실이 구성돼 있다. 결국 건축가가 도면 위에 그어 놓은 선 하나는 그 공간에 속한 사람의 행위를 예고하는 셈이다. 외관과 형태, 재료, 디자인 보다 평면도, 단면도가 제안하는 공간감이 중요한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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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에서도 드러나는 좁고 긴 창의 도열. 취조실이 있는 5층의 창은 다른 부분의 창 폭의 8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창들은 외벽보다 돌출되도록 설치돼 있어 내부에서 손이 최대한 닿지 않게 설계돼 있다. 튀어나온 만큼 확보한 내부 공간에는 덧창을 달아 빛을 차단할 수 있다. 수직의 창은 대부분 종교건축 등 성스러운 공간에 사용된다. 하늘에 닿고자 하는 소망의 건축적 현현인 것이다. 이곳의 수직성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탈주도, 투신도 불가능한 좁고 높은 창, 고문의 틈에 마주한 수직의 빛줄기는 이곳에 끌려온 이들에게 어떤 도구로 작용했을까. 감히 그 감정을 상상해도 될는지, 망설여진다.
시선을 돌리면 주출입구 옆엔 작은 철문이 하나 설치돼 있다. 주 계단 좌측 별실의 돌음계단으로 연결되는 부출입구인데 지상에서 5층 취조실까지 다른 층은 거치지 않고 직통되는 철제계단이다. 5층이니 대략 15m 내외의 높이, 눈이 가려진 채 한발 한발 딛을 때 마다 큰 소리로 울리는 철계단의 소음은 공포를 극대화한다. 게다가 계단참(계단이 각 층에 안착되는 평지) 없이 15m를 뱅뱅 맴돌아 오르는 구조의 계단은 공간감마저 상실케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정신적 타격을 입히기 위한 건축적 장치다.
끌려온 이들에겐 혼란의 도구가 된 복도의 ‘균질성’, 그 끝에 마지막으로 접하게 되는 취조실 내부공간에서는 더욱 세밀한 설계의 성과를 발견할 수 있다. 1980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욕실’ 혹은 ‘욕조’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 건물은 허가 당시 ‘남영동 업무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는데 각 ‘업무실’마다 욕조가 설치된 기이한 건축물이다. 기이한 점은 또 있다. 각 ‘업무실’의 조명은 복도에서 켜고 끌 수 있게 돼 있다. 그리고 내부에는 형광등 1개와 백열등 1개가 별도로 설치돼 있는데 욕조 앞 의자 위에 백열등 빛이 정확히 내려꽂히는 구성이다. 건축주·건축가·허가권자 모두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이런 건물이 지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획안은 매우 치밀해, 건축가로서 경외감이 들 정도다. 건축주의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했든 건축가 본인의 철저한 계획이었든, 이 건축은 건축주의 목적 실현이라는 가치에 있어 매우 완벽한 건축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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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現) Architects H2L 대표
- 현 중앙대학교 건축학부 겸임교수
- 건축사/건축학박사/미국 친환경기술사(LEED 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