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부터 실력 닦은 ‘맨발의 청춘’

강해진 ''IMF 취업시대''
  • 등록 2006-11-22 오전 10:07:48

    수정 2006-11-22 오전 10:07:48

[조선일보 제공] 세대 문제 전문가들은 IMF세대가 “실용성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춘 세대”라고 정의한다. IMF 이전의 대표격인 ‘386세대’는 강인하지만 이념 편향적이다. 2001년 이후 안정기에 대학을 졸업한 ‘포스트IMF 세대’는 실용적이고 유연하나, 강인한 생존력은 약하다. 반면 IMF세대는 이념 대신 실질·실용의 마인드로 무장하고 강인함의 경쟁력으로 스스로를 담금질했다. 현택수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IMF세대는 386세대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과도한 이념성을 띠지 않고, 2000년대 학번처럼 극단적으로 현실적이지도 않다”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뒤 생존법을 찾은, 우리 시대의 이정표가 되는 세대”라고 말했다.

여기 밑바닥부터 시작한 IMF세대 3명의 분투기가 있다. 전쟁의 폐허와 보릿고개를 거친 아버지 세대만큼 극적이진 않지만, 환란(換亂)의 한복판에서 버텨낸 젊은이들은 또 다른 인생의 드라마를 쓰고 있었다.

▲ 이보람씨 (디지털오아시스 CEO) 과외 5개씩 뛰며 학비 벌어 2년간 퇴근 잊은채 IT경력 연매출 45억 벤처회사 창업.

◆창업, 될 때까지 포기는 없다

친구들과 5000원짜리 점심 한 끼를 먹으면 하루 종일 굶어야 했다. 그래도 없는 티는 죽어도 내기 싫었다. 스무 살 여학생은 이를 악물었다. 이화여대 이보람(여·30·95학번·교육공학 전공)씨는 과외를 5개씩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댔다.

가난한 대학생에게 IMF는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1998년 초, 이씨는 휴학을 하고 돈을 벌기로 했다. 청첩장을 찍는 사업을 하겠다며 전국 200여개 예식장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한 곳도 뚫지 못했다. 주인이 던진 신발에 머리를 맞기도 했다. 대학축제 포스터와 책자를 디자인하면서 사업을 이어갔지만 신통치 않았다. 설상가상 1999년 초 IMF 때문에 사업에 실패한 건물주인이 보증금 6000만원을 떼먹고 도망갔다. 첫 사업은 이렇게 허무하게 정리됐다.

“2000년 초 작은 IT회사에 들어갔어요. 월급이 문제가 아니라 인맥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요.” 회사에 살면서 1년에 딱 열흘 집에 들어갔다. 27살, 최연소 팀장이 됐다.

삶이 안락해질 때쯤 그는 제2의 도전에 나섰다. 2002년 온라인 웹페이지를 만드는 디지털오아시스를 창업한 것이다. 지금 그의 회사는 연 매출 45억원 규모로 컸고, 이씨는 주목받는 벤처 유망주가 됐다.



▲ 손승현씨 (한국증권 차장) ARS 증권서비스 바닥일 하루 2~3시간 자며 주식공부 꿈꾸던 증권사서 고속 승진.
◆취업, 밑 바닥부터 차근 차근


1999년 2월, 손승현(32·93학번)씨는 증권사가 목표였지만 뽑아주는 곳이 없었다. 서울의 사립 K대 경제학과를 나왔고 토익도 900점, 미국선물거래소 자격증까지 땄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100곳이 넘게 정신없이 이력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겨우 한 카드회사 계약직 고객상담원으로 취직했다. “하루 종일 고객들의 불만사항을 접수하고 텔레마케팅을 하는 일이었죠. 그래도 고맙기만 했어요.”

꿈을 포기할 수 없어 6개월 뒤 결단을 내렸다. 바닥부터 시작했다. 증권정보를 전화 ARS(자동응답서비스)로 알려주는 서비스 업체에 취직했다. 월급은 100만원 안팎. 그래도 이곳에 가면 증권 차트를 보고 시장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 그렇게 하라면 못할 거예요. 아침 7시30분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차트보고, 애널리스트 보고서를 분석했죠. 그리곤 퇴근해서 모든 종목의 차트를 새벽 3~4시까지 보고 잤으니깐요. 주말도 없었어요.”

그렇게 1년, 감(感)이 왔다. 2001년 4월 손씨는 목표하던 한국증권에 ‘경력직’으로 입사했고, 차장으로 승진했다.

“바닥부터 시작해서 뭐든 열심히 하게 돼요. 어쩌면 20대에 인생의 가장 큰 좌절을 느낀 게 제게는 행운이었을지 몰라요.”



▲ 김정임씨 (두싯 두바이 호텔) 캐디생활로 돈 모아 호주로 500만원만 들고 두바이行 특급호텔에서 영업 담당.

◆해외, 맨손으로 개척한다


1998년, 부모님의 고깃집에 손님이 없었다. 경북대 독문과 3년생이던 김정임(여·31·95학번)씨는 부모님께 “제가 돈을 벌게요”라고 선언하고 휴학계를 냈다. 무작정 대구의 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첫 직업은 골프장 캐디였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1999년 호주로 떠났다. 토마토 농장 인부, 아이스크림 가게 점원 등을 하며 영어를 배웠다. 2000년 한국으로 돌아와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미국·태국·일본을 쫓아다니며 무역실무를 익혔다. 지난해 4월 다시 한 번 인생을 건 결정을 내렸다. 단돈 500만원을 들고 두바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한창 발전하는 두바이라면 저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수십통의 이력서를 냈지만 채용하겠다는 연락은 없었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속도 끓어올랐다. 가져간 돈이 거의 바닥날 무렵인 같은 해 7월, 극적으로 한 주상복합아파트에서 고객서비스 업무를 하는 일자리를 찾았다. 열심히 일했다. 5개월도 안 돼 두바이의 특급 호텔 ‘두싯 두바이’의 연회장 담당 직원으로 스카우트 됐다.

“지금은 제가 원하던 세일즈팀으로 옮겨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어요. 대학 졸업장 없이도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젠 부모님께 돈을 부칠 수도 있고,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믿을건 실력뿐” 자기계발에 올인

IMF세대는 여전히 뜨겁다. 졸업 후 10년 세월이 흘러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자기 경쟁력 계발을 위한 투자에 열심이다.

98년 졸업한 윤모(여·경희대 신방과·94학번)씨의 꿈은 애니메이션 전문가였다. 50여차례 면접을 봐 2000년 첫 직장에 들어간 이후 회사를 여섯번 바꿨다. 그래도 바꾸지 않은 것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영어학원만은 계속 다녔다. 직장이 부도나 월급을 못 받아도 학원비는 냈다.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미국에 애니메이션 유학도 다녀왔다. 그 덕에 올 봄 유명 드라마 제작회사에 취직하는데 성공했지만, 지금도 영어학원은 다닌다. 결국 실력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윤씨는 “다른 세대보다 우리 세대가 더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온라인 취업사이트 잡코리아가 전국 1205명의 대졸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IMF세대의 10명 중 8명은 졸업 후에도 각종 학원이나 대학원에 다니는 등 자기계발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잡코리아의 변지성 팀장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성공한 젊은이들을 보면 IMF 시절에 졸업한 사람들이 많다”며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그들만의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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