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부가가치다)분초가 아깝다

  • 등록 2006-11-03 오후 2:00:22

    수정 2006-11-03 오후 2:00:22

[이데일리 김수헌기자] 앨빈 토플러가 최근 내놓은 저서 `부의 미래`에 보면 사회 주체들의 변화속도를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토플러에 따르면 기업의 변화속도는 100마일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은 30마일로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정부는 기업 변화속도의 4분의1인 25마일, 대학은 10분의1인 10마일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속도가 두자리다. 정치로 가면 3마일이고, 법은 1마일이다. 거의 안 움직인다는 이야기다.

제1부, 글로벌 기업들은 지금
제2부, 한국기업 새 부가가치에 눈뜨다
제3부, 기업환경이 부가가치를 만든다

①분초가 아깝다
②차가운 눈길은 그만

③낡은 규제가 목 죈다
④한국이 너무해
⑤답 없는 지배구조 논쟁
⑥기업 사냥꾼이 날뛴다


지난 2004년 말 삼성전자는 경기도 화성 동탄에 건설할 예정인 반도체 16~21라인 예정부지 땅값 때문에 속을 태우고 있었다.

토지공사가 제시한 가격은 평당 222만원. 메모리반도체는 우리나라 최대 수출품목이자, 엄청난 부가가치를 안겨주는 제품이다. 한마디로 반도체는 이미 한국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대표브랜드가 되다시피했다.

이런 제품을 만들어 낼 공장용 땅에 평당 222만원을 내라고 하니 삼성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삼성전자는 "기업과 반도체산업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라도 공장부지 분양가격은 낮출 필요가 잇다"며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결국 이듬해 손을 들고 말았다. 산업단지보다 두배나 더 비싼 평당 222만원선에 계약을 한 것.

당시 토지공사측은 "비싸다고 생각되면 안사면 그만 아니냐"며 "삼성이 안 산다면 택지로 바꿔 훨씬 비싼 값에 분양할 수도 있다" 말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삼성으로서는 거기에 공장을 지을 수 밖에 없고, 정부는 깎아줄 수 없다고 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안 사면 그만`.  이 말에는 정부 또는 공기업이 민간기업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부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기업의 경쟁력, 다시말해 부가가치창출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은 한국기업들에게 이런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다.

공장부지 50년 임대, 평당 연간 임차료 2천원(원화 기준)~3천원. 지금도 중국에서 50년동안 땅을 빌릴 경우 연간 임차료가 비싼 곳이 평당 6000원 안팎(북경 중관촌 일대), 싼 곳은 1000원대(위해 소주 일대)에 불과하다. 미국에는 분양가가 평당 1달러밖에 안되는 땅도 수두룩하다고 한다. 

◇경제는 21세기, 법은 아직도 20세기

또 한 가지 사례를 보자.

민간기업으로서는 가장 활발하게 해외자원개발 애쓰고 있는 SK. 이 회사는 지난해초까지만해도 정부의 에너지개발정책자금 지원대상에서 배제돼 있었다.

해외자원개발사업법상 외국인 기업으로 분류되기 때문이었다. 만들어진지 25년이 넘은 이 법은 외국인지분이 50%를 넘는 기업은 외국인 기업으로 간주, 정부 정책자금 지원대상에서 빼도록 했다.

국내 자본시장이 외국에 개방되고, 우량 국내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계속 늘었지만 1마일 속도로 변화하는 법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에는 자원개발의 발목까지 잡게된 셈이었다.

결국 SK가 정부와 국회 등 관계기관을 뛰어다니며 법 개정의 필요를 호소했고 일부 언론이 나선 끝에 지난해 2월 법이 고쳐졌다.

◇느린 것이 빠른 것의 발목을 잡아서야

기업인들은 이런 예를 두고 "느린 것들이 빠른 것의 뒷다리를 잡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나 정부는 아직도 기업은 규제를 해야 할 대상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미 누더기가 된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없애는 대신 정부는 순환출자규제 도입의사를 밝히고 있다.  순환출자규제는 도입의사를 강력하게 내비치고 있는 공정거래위원회와 이에 반대의사를 밝히고 있는 재경부 산자부 등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일부 교수들은 출총제와 마찬가지로 순환출자 규제 역시 누더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논란은 확대되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의 이천공장 증설규제도 풀릴지 안 풀릴지 안개속이다.  지난달 중국에 첨단 12인치 웨이퍼 합작공장 가동을 시작한 하이닉스반도체는 이천 증설이 막힌다면 중국에 추가공장을 건설하는 방안도 검토대상에 올릴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현대차 LG전자 등 빅3 기업이 최근 4년동안 해외에서 5만3000명을 고용한 반면 국내에서는 4만4000명을 뽑는데 그쳤다는 보도가 최근 있었다. 이 기간 해외 고용은 85.6%나 급증, 36.0%에 불과한 국내 고용 증가율을 크게 앞섰다고 한다.

느린 것이 빠른 것의 뒷다리를 잡는 규제환경때문이다.

◇경제발전주체 1등 정부 2등 소비자..기업은?

한 경제단체가 실시한 설문조사는 초중고교생들의 기업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학생들은 경제발전주체로 정부를 가장 많이 꼽았고 소비자가 그 다음이었다. 정작 기업은 최하위로 여겨졌다.

기업인들은 이에 대해 "학교에서부터 기업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를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말했다. 

정부 정책은 어떤가. 태반이 현실과 시장을 모르는 책상머리 정책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중소기업의 숨통을 틔우겠다는 금융지원정책은 정말 돈이 필요한 중소기업에게 온기가 전해지기까지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현장 목소리다. 중소기업인들은 "정책 당국자가 중소기업 사장 10사람만 만나봐도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유통업계의 인수합병과 관련한 공정위의 독과점 판단에 대해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혀를 내두른다. 시장현실에 대해 눈감고 내리는 결정이 아니냐는 것이다. 

◇분초의 전쟁속에 규제까지?

최근 국내 한 전자업체 해외법인은 한국에서 휴대폰을 조달하지 못해 애를 태웠었다. 유럽시장에서 한국산 휴대폰 신제품에 대한 수요가 부쩍 늘었는데, 추석 연휴 등으로 한국 내 공장 생산이 달려 수요를 맞추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해외시장에서는 글로벌 기업간 경쟁이 치열하다. 분초를 다투는 시장에서 제때 물량을 공급하지 못하면 시장을 뺐기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기업이기 때문에 해외의 막강한 유통업체들을 상대하면서 여러가지 불리한 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외국기업으로서 한국기업이 해외에서 받아야 하는 차별적 규제도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조차 기업의 경영활동을 옥죄는 규제가 넘쳐난다면 한국 기업은 어디서 경쟁력을 확보할 것인가?

얼마전 만난 공정거래위원회 고위간부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사회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곳이 기업밖에 더 있습니까. 정부가 부가가치능력이 있습니까. 시민단체가 있습니까. 기업들이 제대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펴는게 중요합니다. 다만 법에 어긋하는 행동에 대해선 법과 규정에 따라 규제를 받는게 옳다고 봅니다"

기업인들은 "말 뿐이 아니라 정책과 의사결정에서 이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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