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마침내 북극점에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너무 기뻐 마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산악인 박영석(42)씨가 마침내 북극점을 밟았다. 지난 3월 9일 캐나다령 워드헌트(북위 83도3분)를 떠나 짐썰매를 끌고 얼어붙은 북극 바다를 걸은 지 54일 만이다.
그는 이로써 히말라야 8000m급 거봉 14좌, 7대륙 최고봉, 북극·남극점을 모두 밟아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세계 최초의 사나이가 됐다. 1993년 국내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무(無)산소 등반한 지 12년 만이다.
대장 박씨와 대원 3명(홍성택·오희준·정찬일)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북극점에 도달한 것은 한국시각으로 1일 새벽 4시45분. 위성전화로 전해온 그의 목소리는 성취의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
“무릎 꿇고 싶어질 때 1%의 가능성만 있으면 포기하지 않는다는 신조로 버텼습니다. 본능적인 욕구와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준 대원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동상(凍傷)에 걸리고 기력도 쇠잔해 있지만 대원들의 상태는 크게 문제없습니다. 몸은 곧 회복될 것입니다. 또 그렇게 험난했던 북극의 기억도 아마 그리워질 것입니다.”
박영석 원정대가 출발한 워드헌트에서 북극점까지의 거리는 775㎞. 그러나 원정대가 실제 걸었던 거리는 이의 2배쯤 됐다. 리드(얼음이 갈라져 바닷물이 드러난 곳)와 얼음절벽인 난빙 등을 만나면 둘러가야 했기 때문이다.
대륙인 남극과 달리 얼음바다로 이뤄진 북극의 경우, 풍향과 해류의 영향을 받아 원정대의 위치가 움직이기도 한다. 가령 북쪽으로 수십㎞를 올라갔는데도 해류에 밀려 실제 위치는 뒤로 밀려나 있는 경우가 있다. 물론 반대로 가만히 있는데도 북쪽으로 떠밀려 올라가는 수도 있다.
이들은 원정 출발 때 한 사람당 약 100㎏에 육박하는 짐썰매를 끌었다. 원정 과정에서 필요한 식량·연료들이다. 하지만 속도를 내기 위해 원정 종반엔 짐무게를 줄였다. 박씨는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식량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버려야 했다”고 했다.
또 이들은 북위 88도를 넘어선 뒤엔 잠을 줄였다. 매일 16시간 이상씩 걸어 당초 예정보다 6일을 앞당겨 북극점에 도달했다.
대원 전원이 영하 30~40도의 혹한(酷寒)으로 손발과 얼굴·허벅지에 동상을 입었다. 박씨와 홍성택씨는 북극점에 도달할 즈음 강한 자외선에 오래 노출돼 설맹(雪盲)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박씨는 “지금 우리 원정대원들은 문명 세상의 사람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씻지 않은 대원들의 얼굴은 온통 시커먼 때와 눈물로 범벅이 됐습니다”라고 감격의 모습을 전했다.
박씨는 재작년 2월 북극점에 도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실패했다. 영하 50도까지 표시할 수 있는 온도계의 눈금이 바닥을 치는 혹한, 그리고 고산 등반과 전혀 다른 북극의 환경에 대한 경험 미숙 때문이었다. 그때의 실패가 이번 성공의 가장 값진 밑거름이 된 것이다.
“우리 원정대만의 영광은 아닙니다. 역사는 박영석이 아닌 한국 사람이 산악 그랜드슬램을 처음으로 해냈다고 기록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