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edaily 정명수특파원] 중앙은행은 정부의 재정정책, 외환시장 정책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마찬가지로 정부도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이 불문율을 몇 차례 가볍게(?) 위반했다. 지난해 11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리고 지난 4일에는 런던 G7 회담에서 달러 약세와 경상수지 적자 문제에 대해 연거푸 언급하면서 외환시장에 적지 않은 충격파를 던졌다.
11월에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가 궁극적으로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우려하더니, 런던에서는 경상수지 적자가 장기적으로는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6년 퇴임을 앞둔 늙은 마에스트로 그린스펀이 노망이 든 것일까. 왜 자꾸 말을 바꾸면서 존 스노 재무장관의 일인 외환시장 정책에 대해 "감 놔라, 대추 놔라" 말이 많은 것일까. `신중한 금리 인상(measured pace)`이라는 통화정책 모토가 식상해져서 외환시장으로 관심사를 옮긴 것일까. 의회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그린스펀의 속마음을 짚어 보자.
◇환율과 수입물가
그린스펀의 속내를 들여다 보기 위해서는 그가 제시한 몇 가지 힌트를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런던 연설에서 그는 달러 약세가 수입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며 "지난해 1분기까지만해도 유럽 기업들은 마진 축소를 통해 통화 강세 충격을 흡수했으나, 이후 통화 강세가 지속되자 강력한 저항감을 표출했고, 급기야는 대미 수출 가격을 인상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유로/달러 환율이 상승하며 유로 강세, 달러 약세가 심화되면서 유럽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제조업 생산품의 가격이 비교적 큰 폭으로 올랐다. 과거 데이터를 봐도 유로가 강세를 보이면, 미국으로 수출하는 수출품 가격이 올랐고, 유로가 약세를 보였을 때는 수출품 가격이 떨어졌다.
그러나 일본과 아시아 시장으로 넘어오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아래 그림은 199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달러/엔과 일본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수출 물가(미국 입장에서는 수입 물가) 지수를 표시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엔화가 초강세를 나타냈을 때, 대일본 수입 물가도 유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파르게 올랐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는 엔화 가치의 변동에 대해 물가 지수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전년대비 물가 상승률을 보면, 엔화가 강세를 보일 때 분명히 가격 상승 압력이 있지만, 일정 수준을 넘지 않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유럽 기업들과 달리, 엔 강세-달러 약세에서 오는 가격 압력을 상당 부분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들은 한 술 더 뜬다. 94년 이후 이들 신흥 공업국들로부터 미국으로 수출되는 생산품 가격은 사실상 한 방향으로 하락하기만 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디플레이션 걱정으로 정신이 없을 때,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디플레를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다"고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린스펀은 달러 약세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유럽 기업들이 수출 가격을 인상하는 것을 보고, 대미 수출을 줄이겠다는 의사 표시라고 생각했다. 일본과 중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결국은 유럽을 따라, 가격을 인상할 것인가. 그린스펀의 런던 연설 어디에도 이같은 `전망`은 없다.
달러 약세가 심화되면 미국으로 수입되는 물품의 가격이 올라야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린스펀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일본, 중국 너희들은 언제까지 버틸테냐"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말은 결국 일본, 중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낼 만큼 달러 약세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금리 인상만으로 경상적자 해결 못한다"
런던 연설에서 그린스펀은 소비를 억제하지 못하는 `미국병`의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는 "미국은 모기지 파이낸싱을 이용한 소비가 다른 나라들보다 강하기 때문에 미국에 수출하는 기업들은 기꺼이 낮은 마진으로도 수출을 한다"며 "이같은 메커니즘이 달러 약세의 효과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집을 소유한 미국 중산층은 집 값이 상승하거나, 금리가 떨어지면 모기지 리파이낸싱을 통해 상당한 목돈을 쥘 수 있다. 이 돈이 소비로 연결되고, 가계 부채를 줄이는데도 사용된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면 시중 금리가 올라가고, 저축률이 높아지면서, 소비가 줄어야한다. 미국의 경우에도 금리가 상승하면, 소비 확대에 일단 제동이 걸린다. 그러나 소비하는 것이 경제 활동의 전부라고 믿고 있는 미국인들의 소비 욕구 자체를 근본적으로 돌려놓지는 못했다.
미국의 금리가 오르건, 내리건, 무역적자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린스펀의 런던 연설은 금리 인상만으로는 경상수지 적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고백인 셈이다.
◇"달러 약세 끝나지 않았다"
그린스펀의 런던 연설은 11월 프랑크푸르트 연설에 비해 낙관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상수지 적자가 장기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달러 약세가 지속돼야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유럽이 백기를 든 것처럼, 일본과 다른 아시아 수출국들이 가격 인상에 나서야하는데, 아직은 그런 시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일본, 중국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쉽지 않다. 10년 불황의 늪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일본이 수출이라는 줄을 쉽게 놓을 리 없다. 중국도 먹여 살려야할 인구가 얼만데, 외부 압력에 굴복해서 위안화를 절상하고, 수출을 줄이겠는가. 버티는 아시아와 밀어 부치는 미국. 타협이 이뤄질 때까지 스노 장관은 달러를 끌어내리려고 할 것이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통화 긴축 정책이 방만한 재정 지출을 억제하고, 가계 단위에서의 소비를 제어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상적자를 줄일 수 없다. 미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소비를 줄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만약 소비를 억제시킬 마음이 있다면, 달러 약세라는 우회적인 전략이 아니라, 소비세 도입같은 직접적인 재정정책을 썼을 것이다. 미국 경제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소비를 하지 말라는 것은 경기 불황을 감수하라는 뜻이다. 어떤 정부도 불황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린스펀도 마찬가지다. 시급한 인플레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 대외 수지 균형을 위해 무작정 돈 줄을 죌 수는 없다.
이제 그린스펀이 스노 장관이 머쓱해지도록 환율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를 살펴볼 차례다. 연준리의 통화 정책은 2000년초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디플레이션 방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좀처럼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 그린스펀이 의회 청문회에서 수차례 `디플레`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이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디플레를 진화되고, 경기가 터닝하자, 그린스펀은 `신중한 금리 인상`이라는 말로 통화정책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연준리 내 매파들이 달러 약세로 인한 수입 물가 압력, 고용시장 호전에 따른 인플레 압력을 거론하며 강력한 긴축 정책을 주문하고 있지만, 그린스펀은 요지부동이다. 조만간 `신중한`이라는 표현이 없어지겠지만, 이 말을 버릴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한다.
런던 연설에서 그린스펀이 수입 물가에 대해 이례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 그 단초가 될 수 있다. 달러 약세가 지금보다 더욱 심화되고, 일본과 한국이 수입 물가를 올리고, 중국도 위안화 평가 절상에 나섰을 때 그린스펀은 `신중한`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떨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린스펀 자신도 미국 경상수지 적자를 해결할 유일한 대안으로 달러 약세를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린스펀은 역사적으로 금리 인상이 경상적자 경감에 별 다른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런던에서 "시장의 압력으로 경상수지 적자는 안정 국면에 들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시장의 힘은 `금리의 힘`이라기 보다는 `환율의 힘`인 것이다.
그린스펀이 `신중한`이라는 말에서 벗어나려면 고용시장과 생산성, 인플레의 관계에 대해서도 해명해야한다. 미국 국회의회들이 이 부분에 대해 질문할 때 그린스펀은 뭐라고 답할까. 런던 연설만큼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준비돼 있는 것은 아닐까, 기대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