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에선 사랑의 냄새가 난다

신촌로터리 헌책방
  • 등록 2010-02-18 오후 12:15:00

    수정 2010-02-18 오후 12:15:00

[조선일보 제공] 파리의 노른자 땅, 노트르담 성당 앞에는 허름한 서점 하나가 센 강을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붙어 있다. 주인장 조지 휘트먼이 "노트르담 성당의 별관"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이름도 고풍스러운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이다.

서점 안 풍경은 고풍스러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다소 어수선하고 칙칙하다.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책들이 노트르담 성당의 첨탑 모양으로 천장을 찌를 듯 삐죽하게 솟아있다. 그 내부 풍경이 궁금하다면 영화 '비포 선셋'(2004)의 첫 장면을 잠시 떠올려 보자. 멋진 작가로 성장한 주인공 제시(에단 호크)가 프랑스 독자들과 만나 치열하게 문학적 감수성을 나누던 곳이 바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의 실제 모습이다. 1년 후 다시 만나자는 헛된 약속을 뒤로 한 채 애틋하게 멀어졌던 '비포 선라이즈'(1995)의 두 연인은 9년이 지난 어느 날 파리의 서점에서 다시 만난다. 한 사람은 'This Time'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로, 한 사람은 'Green Cross'라는 환경 단체의 일원으로.

오래된 책들의 냄새가 아릿하게 흘러나오는 고서점이 두 사람의 재회 장소로 선택된 것은 나름 의미심장하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은 10여 년간 곰삭은 두 사람의 추억처럼 시간이 만들어낸 화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곳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은 단순한 책방이 아니다. 파리에서 가장 전망 좋은 무료 여관이자 매일 공짜 홍차 파티가 열리는 곳, 급진적인 생각이 오고가는 치열한 토론장이다. 파리 중앙에 이런 놀라운 공간을 만들어낸 인물은 무정부주의를 꿈꾸는 시인 조지 휘트먼. 그는 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좋은 글을 쓸 역량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점에서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제공해준다. 빵도 주고 가끔 차도 내준다. 파리의 배고픈 작가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서점의 멋진 역사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픈 관광객들까지 모여들어 연일 서점 안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 헌책에 묻은 먼지만큼이나 많은 사연이 숨어 있는 곳. 헌책방이‘도시의 기억창고’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은 신촌로터리의‘공씨 책방’.

◆80년대 문학 사랑방 공씨책방

헌책에 묻은 먼지만큼이나 풍성한 사연을 지닌 헌책방들은 알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서점은 신촌로터리에 있는 '공씨책방(02-336-3058)'이다. 이곳은 80년대 광화문에서 처음 '고서백화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래 30여 년간 우리나라 헌책 업계를 꿋꿋이 지켜왔다. 주인장 공진석씨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인물. 대신 그는 끓어오르는 지적 허기를 매일 책으로 달랬다. 미친 듯이 책을 읽는 것으로 모자라 책을 파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책을 죽도록 사랑하는 주인장이 운영하는 서점에는 책을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정호승, 이문재 등의 시인은 당시 '공씨책방'의 단골로 활약했던 인물들이다. '공씨책방'의 단골들은 이곳에서 책만 사고파는 게 아니라 문학과 사회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했다.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벌이는 일종의 문학 사랑방이 만들어졌다. 책에 대한 공진석씨의 남다른 애정은 학민사에서 나온 유고집 '옛 책, 그 언저리에서'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씨책방'의 주인은 옛 책 그 언저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1990년 7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새로운 논문 더미를 안고 돌아오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이후 '공씨책방'은 공진석씨의 처제와 조카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 공씨의 책 '옛 책, 그 언저리에서'는 절판된 지 오래다. 공씨가 그토록 아꼈던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저서는 헌책방을 잘 뒤져야만 만날 수 있는 희귀본이 된 셈이다.

▲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헌책방은 도시의 기억 창고

신촌로터리에는 헌책방 터줏대감인 공씨책방 외에도 수십 개의 헌책방들이 보물처럼 숨어 있다. 만화전문 서점 한양문고(02-338-5210)부터 디자인 전문 서점 온고당(02-332-9313)에 이르기까지, 개성 만점의 헌책방들이 저마다의 전문성을 무기로 책벌레들을 유혹한다. 그 중 숨어있는 책(02-333-1041)은 출판사 출신의 주인이 만든 헌책방답게 책에 대한 주인장의 애정이 오롯이 느껴지는 곳이다.

대부분의 헌책방들은 마구잡이로 쌓아올린 책들이 두툼한 산맥을 이루고 있어 원하는 책을 찾기가 만만치 않지만 이곳은 다르다.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 책 찾기가 수월하다.

▲ 신촌로터리 헌책방 순례. 디자인책은 온고당(02-332-9313), 만화는 한양문고(02-338-5210), 전철 신촌역 1번 출구에서 출발.

'숨어있는 책'처럼 단골이 많은 서점으로는 디자인 전문 '온고당'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젊은 예술가 지망생들이 모이는 성지 같은 곳으로 일찌감치 홍대 앞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1층만 대충 훑어보면 다른 곳과 별반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술 관련 서적들이 넓은 점포 안에 가득 채워져 있어 디자인 업계 종사자나 미술, 건축학도들이 수시로 이곳에 들러 유행의 흐름을 읽는다. 

▲ 황희연 영화·여행 칼럼니스트
서울 시내 곳곳에 수백 개의 헌책방이 운영되고 있지만, 신촌로터리는 특색 있는 헌책방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헌책방 순례지다. 다른 사람의 기억이 묻은 책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는 것은 도시를 새롭게 돌아보는 또 하나의 방법. 누군가의 메모와 밑줄을 정신없이 뒤적거리다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오고, 명치끝이 수시로 저려온다. 그 추억의 일부를 함께 작성하고 싶은 바람이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헌책방은 책들의 무덤이 아니라 탄생의 요람이요, 매력적인 도시의 기억 창고가 분명하다.

찾아가는 길|신촌로터리 헌책방 순례를 나섰다면 지하철 2호선 신촌역 혹은 홍대입구역을 출발지로 정하는 것이 좋다. 신촌역 1번 출구 현대백화점 방면으로 나와 직진해서 5분 정도 걸어가면 공씨책방(02-336-3058)이 나오고, 홍대입구역 방면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글벗서점(02-333-1382), 우리동네 헌책방(02-326-1187)이 나온다. 공씨책방 맞은편 골목에 숨어있는 책(02-333-1041)이 있고, 여기서 홍대 정문 쪽으로 걸어가면 온고당 서점(02-332-9313)이 나온다. 내친김에 시간을 넉넉히 잡고 연대 앞의 정은서점(02-323-3085)이나 이대 근처의 뿌리와 새싹(02-392-6004)까지 꼼꼼히 둘러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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