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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과거로 가볼까요?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친박과 비박이 나뉘었고, 친박 안에 굳이 ‘진박’이라는 카테고리를 넣기도 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친노, 비노가 있겠고, 3김 정치 시대로 올라가면 동교동계, 상도동계 등이 오르내렸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랐던 정치인들을 ‘동교동계’,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정치인을 상도동계라고 불렀던 것이죠.
권력을 사이에 두고 주류와 비주류가 나뉠 수 밖에 없고 그 안에 계파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권력자는 줄 세우기를 통해 측근들의 충성도를 시험하려고 하고, (혹은 줄 서기로 자신의 충성도를 증명하려 하고) 그 줄에서 멀어질 수록 ‘비주류’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계파 정치는 뿌리 깊고 인류의 역사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침팬지 무리 안에서도 사실상 여당과 야당이 나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따라서 권력에 가까이 가고, 이를 나눠 누리려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생물학적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이로 50~60 넘는 국회의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삐지고, 화내고’ 하는 것이나 어린이집 유아들이 선생님한테 이르고 삐지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본인들은 자신이 여론 등에 의해 ‘특정 계파’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이 안에서 서로 친하고 똘똘 뭉쳐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한 리더를 모신다’라는 공통점을 빼면 그저 이합집산으로 몰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 역사소설 ‘삼국지’에서 봤던 ‘도원의 결의’ 같은 낭만은 실상 없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진짜 친명, 진짜 윤핵관은 본인 스스로 “나 친명이요”, “나 윤핵관이요”라고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남들이 다 인정하는 데 굳이 내 입으로 말할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찐부자들이 ‘입’이 아닌 ‘소비’로 본인의 부를 드러내는 것처럼요.
반대적인 예는 “나 윤핵관입니다”, “나 친명입니다” 하고 대놓고 과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남들은 관심도 없는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드러내는 경우죠. 지난해 대선 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수십명의 윤핵관, 수백명의 친윤이 ‘양산’된 게 한 예입니다.
개중에는 진짜 윤석열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을 인사가 있겠지만, 윤 대통령과의 실낱 같은 인연을 근거로 삼은 윤핵관도 두루 있었습니다. ‘정치 경력 1년, 평생을 검사로 살아온 초보 정치인 윤석열 대통령의 핵심 인사가 그렇게 많을 수 있겠구나’ 놀랄 정도였습니다.
어떤 의원은 ‘친명’과 ‘비명’을 일도양단으로 나누는 것에 대한 불합리함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정당인으로서 지도부를 도울 뿐인데 “친명으로 갈아탔다”라는 비난을 들어서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친명이야”라며 이를 상징하는 공개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비명’으로 분류되고 순식간에 수박이 되는 형태입니다. 목소리 큰 극렬 지지자들에 의해 ‘정의’가 되는 것이죠. 지금의 계파정치가 과거의 계파정치와 달라진 점입니다. 여론이 아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근거한 대중이 주도하는 계파정치의 시대가 된 것이죠.
다만 국회에서 일하는 국회의원들을 보면 계파를 나누는 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핵심 계파 의원들을 빼면 불분명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과거 리더(계파)에 대한 의리일 수 있고, ‘당 대표니까 따른다’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재명 대표나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전까지 원외 비주류 인사였다는 점도 고려해야겠죠.
계파정치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계파정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서로 견제를 하면서 ‘비교적’ 건강하게 발전해 나가곤 했습니다.
문제는 지나칠 때입니다. 다양성을 무시한 채 특정 계파 추종이나 이념을 강요한다면 무시무시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특정 계파나 개인에 권력이 지나치게 몰리면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왕조국가도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