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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인구 기자] 최근 성황리에 막을 내린 2013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기간 중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요철 발명왕’ ‘맹꽁이 서당’ 등 1970~80년대 명랑만화로 최고 인기를 누렸던 윤승운(70) 화백. 윤 화백은 이번 SICAF 특별전의 주인공이었다. 만화를 그린 지 반백 년이 넘은 그의 만화인생과 작품을 기념해 서울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윤 화백이 연재하는 만화잡지 ‘어깨동무’와 ‘보물섬’의 열혈팬이었던 기자는 단숨에 달려가 노화백을 만났다. 경기 남양주 별내의 전원 속에 살고 있는 그는 자신을 기억하는 기자 팬을 위해 일부러 상경해 소중한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그가 그린 만화만큼이나 명랑하고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명랑만화는 개그다”
윤 화백은 길창덕·신문수 화백과 함께 우리나라 명랑만화의 원조로 불린다. 명랑만화란 말 그대로 밝고 유쾌한 만화, 보고 있으면 웃음이 터지는 만화를 말한다. 허영만·이현세 화백이 누가 봐도 잘 그린 극화로 사랑받았다면 윤 화백은 조금은 어눌하지만 재치있는 대사로 독자에게 호소했다. 특히 다소 거칠거나 유치해보이는 그림체는 오히려 편안함과 친근함을 전해줬다. 1970~80년대 초등학생들 사이에는 ‘꺼벙이’(길창덕), ‘로봇 찌빠’(신문수), ‘맹꽁이’(윤승운) 등을 모르면 ‘간첩’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명랑만화의 원조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일본만화도 많이 봤다. 데즈카 오사무의 수석제자 이시노모리 쇼타로, 요코야마 유이치 등이 명랑만화를 잘 그렸지. 하지만 우리가 똑같이 베낀 건 아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식으로 소화했다. 특히 내게 스승 같은 길창덕 선생은 폭소만화를 개척하신 거나 다름없다. 우리 만화계의 큰 전환점이 된 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명랑만화는 개그라고 할 수 있다.”
윤 화백의 작품엔 곳곳에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친다. ‘요철 발명왕’에 보면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요철이가 외계인을 만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요철이가 지구 쓰레기를 보물이라고 속여서 외계인이 싹 수거해 가도록 한다. 쓰레기 없애고 돈까지 버는 ‘봉이 김선달’ 같은 게임이다. 지금이야 외계인 소재가 흔해졌지만 30여년 전만 해도 좀처럼 떠올리기 힘든 스토리텔링이었다. 게다가 개그와 위트가 녹아있었다.
▲때론 천진난만한 요철이처럼
“전원생활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젖먹이 둘 데리고 들어갔던 곳에서 살고 있다. 예전엔 허허벌판이었는데 지금은 몰라보게 변했다. 아파트도 많이 들어서고… 유기견은 어쩌다보니 기르게 된 거다. 임신한 유기견이 죽어가는데 내버려둘 수도 없고 해서 거둬 기른 게 이렇게 많아졌다.”
성격은 스스로 “요철이처럼 산만한 편”이라고 표현했다. 그 나이면 으레 갖고 있을 법한 권위나 고집은 없어보였다. 70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아이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원동력 같았다. 윤 화백은 원로 만화가치곤 참 말이 많았다. 질문을 하나 던지면 어느새 답변은 그 질문을 넘어서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였다. “잠깐 내가 무슨 말 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아 그래 그 얘기였지”하기를 수차례. 그러나 늘 유쾌하고 겸손했다. 웃음이 넘쳤다.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만화를 그린다”는 말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그야말로 힐링의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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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화백은 올해부터 다시 ‘맹꽁이 서당’을 그리고 있다. 1975년부터 1984년까지 ‘어깨동무’에서 9년간 7편, 1998년부터 2006년까지 8년간 고려시대 편까지 연재한 후 세 번째다. ‘맹꽁이 서당-논어’ 편으로 잡지 ‘생각쟁이’에 7년 만에 다시 연재를 시작했다.
“요즘은 만화책이 학습서가 되는 시대지 않나. 조선·고려시대 편 이후에 늘 마음속에 공자의 논어를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성균관대 사회교육원에서 2년간 한문공부를 하고, 다시 한림원 등에서 5년간 유학책을 봤다. 논어 관련 책만 100권 넘게 읽은 것 같다. 공자가 일흔을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고 해서 종심(從心)이라고 표현했는데 아마도 이번에 그게 이뤄진 모양이다.”
예전에 길창덕·신문수·박수동·이정문·고우영·이두호·김원빈 등 원로 만화가들과 함께 심수회란 모임을 가진 적 있다. 윤 화백은 요즘은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이들과 함께 뭔가 기념이 될 만한 일이 있다면 참여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1970~80년대 한국만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표주자들이 한 데 모인 만화박물관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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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고희. 만화를 그린 지 50년이 넘었다. 1961년 10대에 ‘아리랑’ 신인만화 공모전 입선을 통해 데뷔했다. 대표작으로 ‘두심이 표류기’ ‘요철 발명왕’ ‘탐험대장 떡칠이’ ‘맹꽁이 서당’ 등이 있다. 작품들은 ‘어깨동무’ ‘보물섬’ 등 당시 최고 인기의 어린이 만화잡지에 연재됐다. 특히 ‘맹꽁이 서당’은 훈장이 악동 같은 학동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지금 만화학습서의 원조나 다름없다. 조선·고려시대를 총 17년간 연재했고 최근엔 ‘맹꽁이 서당-논어’ 편의 연재를 시작했다. ‘논어’ 편에선 그의 풍부한 지식과 독서량을 엿볼 수 있다. ‘생각쟁이’ 8월호에 실린 원고는 ‘공문십철(孔門十哲)’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어린이들이 접하기엔 다소 어려운 내용이지만 명랑개그로 풀었다. 개구쟁이 학동들이 “‘공문십철’은 공자의 가장 철이 없는 제자들”이라고 엉뚱한 대답을 내놓자, 훈장이 “공자의 가장 뛰어난 제자 10명, 안회·민자건·염백유·자공·자로 등을 일컫는다”고 설명해주는 식이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버무려 어린이들이 만화를 보면서 자연스레 학습이 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사진>
윤승운 화백이 인터뷰 말미에 두 장의 사인을 해줬다. 하나는 기자에게, 다른 하나는 이데일리 독자들에게. 그림을 포함한 사인 한 장을 완성하는 데 10분 가까이 걸렸다. 진심과 정성이 또 한 번 느껴졌다. “이데일리 독자 여러분, 늘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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