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수 개인들이 주도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황금을 찾으려는 인간욕구의 자연스러운 분출이 아닌가 싶다.
한국판 골드러시.
위 소식을 접하면서 노다지 캐러 가는 사람들이 한반도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사실 삼천리 금수강산은 미국 캘리포니아 못지 않은 금 산지였다. 일제 시기 황금광시대(黃金狂時代)라는 한반도판 골드 러시도 있었다.
돈 많고 빽 있는 사람들이 이 시대 주인공이 아니었다. 평범한 식민지 조선인들이 바로 노다지의 주인공들이었다. 당시 일제 식민지 백성들은 너도나도 최창학(崔昌學) 과 방응모 신화를 쫒아 금을 채러 산과 들 그리고 냇가로 내달았다.
정재벌(三井財閥)에 매각하고 막대한 일확천금을 움켜 쥔다.
이후 1930년대 황금광 시대를 풍미한 것은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였다. 방응모 역시 평안북도 정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동아일보 신문지국을 맡아하는 일반 시골 사람이었다. 그는 1924년 마흔살의 나이에 노다지를 찾는 길에 들어서 금광 덕대 일부터 시작했다.
삭주군 교동 폐광을 얻어 금을 캐는 일을 시작한 그는 한때 전재산을 날리고 빚까지 지며 3년을 죽을 고생 한 끝에 드디어 금맥을 찾았다. 이 교동금광은 1930년대 대표적 식민지 조선 금광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노다지 열기는 평범한 일반 백성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동경 유학을 한 지식인 등 당대 엘리트들도 황금광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당시 유명한 식자들도 책상머리를 박차고 들과 산으로 뛰쳐 나갔다.
시중 금값이 작금에 온스당 1,000 달러하는 시대를 맞아 다시금 한반도 사람들이 너도나도 금 찾기에 나서는 21세기 한반도 골드 러시가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가.
최근 금값이 폭등하자 가격 채산성이 맞지 않다며 채광을 포기한 금광들에 하나 둘씩 관심을 갖고 탐사를 시작한 것이 이러한 조짐의 일환이 아닌가 싶다.
한손에는 금 투자 안내서와 지도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곡갱이와 삽을 들고 산으로 들로 개천으로 노다지를 캐러 가는 사람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나타날 때면 필자도 이들 속 에 끼여 있을가?
이동엽 칼럼리스트는 '금 투자의 정석 - 황금은 보험용 안전자산이다' 와 ‘원자재 실물투자 가이드 – 한국인을 위한’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