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투명성 위기-①드러나는 총체적 부정

  • 등록 2002-07-09 오전 10:21:51

    수정 2002-07-09 오전 10:21:51

[edaily 전미영기자] 미국의 "투명성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엔론과 월드컴에 이어 미 제약업체 머크의 분식회계 문제가 드러나면서 "주식회사 미국"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탄탄한 기업지배구조와 투명한 회계처리를 기반으로 미국이 누려왔던 프리미엄이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한 가운데 미 주식시장과 달러화는 연일 하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미 투명성 위기의 본질과 현황 그리고 전망을 국제부에서 3회에 걸쳐 분석한다.<편집자>

미 투명성 위기-①드러나는 총체적 부정
엔론 이후 크고 작은 기업들의 분식회계 문제가 이어지면서 미국이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애널리스트는 파산 직전에 놓인 기업에 대해서도 매수 추천을 남발하고, 회계감사법인과 기업 경영진은 허위 재무제표를 작성해 주주와 투자자들을 호도하는 "체계적인 부정"이 그간 계속 저질러져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속출하고 있다.

엔론 파산 이후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이 같은 총체적인 회계부정이 일회성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엔론이 엔론으로 그치지 않고 "엔론식(式)"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엔론의 경쟁업체인 다이너지, 엘파소, 윌리암스 등 에너지기업은 물론이고 퀘스트, 타이코, 임클론, 글로벌크로싱 등이 회계비리로 잇달아 도마 위에 올랐고 6월 말엔 미 2위 장거리전화사업자 월드컴의 38억달러 규모 분식회계 문제가 불거졌다. 그리고 8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에 의해 드디어 분식회계의 불길은 세계 3위 제약업체인 머크에게까지 번졌다.

머크가 분식회계 의혹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24억달러에 달하는 사상 초유의 매출조작 규모도 그렇거니와 이 회사가 신용등급 "AAA"를 받고 있는 소수 미 우량기업 중 하나라는 점, 지금까지 문제가 돼온 에너지나 텔레콤 업종이 아닌 제약업체라는 점에서 머크의 회계 부정은 미 투명성 위기의 심각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 기업들의 재무제표 조작이 우량기업과 부실기업을 가리지 않고, 그리고 특정 업종에 국한되지 않고 이뤄졌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8일 세계 금융시장의 움직임은 머크 충격의 강도가 어떤 것인지, 미국식 모델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커지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미국 달러화는 일본 엔화에 대해 119엔 아래로 떨어졌고 아시아와 유럽 주요국 주식시장은 일제히 약세를 나타냈다.

미국 주식시장도 머크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부에선 그간 계속된 분식회계 파문으로 미 증시가 어느 정도 내성을 갖게 됐을 것이란 기대를 표했지만 갈수록 깊어지는 상처만 드러났을 뿐이다. 다우지수는 9300이 무너졌고 나스닥지수도 1400 선을 간신히 지켰다. 이로써 지난 주 마지막 장인 5일의 랠리가 지속될 가능성은 곧바로 무산되고 말았다.

SG코웬의 선임 주식거래인 팀 스몰은 "5일의 반짝 랠리는 수일 간 분식회계와 관련된 새로운 악재들이 출현하지 않았다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분식회계 문제가 그 만큼 미 증시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주식시장이 하락하기 위해서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어느 한 기업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는 소식만으로 충분하다"고 장 분위기를 설명했다.

이는 역으로 분식회계 파문이 가라앉아야만 미 증시가 진정한 상승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미 증시의 전망은 결코 낙관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엔론에서 월드컴 그리고 머크로 이어진 대형 회계부정은 또 다른 기업의 회계비리가 적발돼도 그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가의 유명 전략가들 가운데 향후 증시 전망에 대해 가장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레비 인스티튜트의 데이빗 레비는 "실제 구체적인 회계비리에 연루된 기업은 많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수 기업이 편의적인 회계처리로 투자자를 오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면서 "회계 파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밖에 최근 주가지수 전망치를 하향 조정한 월가 주요 전략가들 가운데 UBS워버그의 에드 커쉬너와 에렌크란츠킹누스바움의 배리 하이먼 등도 전망치를 낮춰잡은 주요 이유로 분식회계 파문을 꼽았다.

분식회계의 먹구름이 언제 걷힐지 시계가 매우 불투명한 탓에 그간의 주가하락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은 저가매수의 기회 보다는 미래의 위험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AMG데이타서비스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 6월 주식형 뮤추얼펀드에선 118억달러가 유출돼 9.11테러가 터진 지난해 9월 이후 최대 규모의 자금이 빠져나간 것으로 추산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와 관련, 개인 투자자들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순 없지만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될 경우 기관투자가들도 매도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하고 있는 미 기업들의 분식회계 파문이 쉽사리 가라앉을 것으로 예상되지 않는 이유는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는 회계부정의 후보군이 적지 않고 따라서 언제 또 다른 비리 사건이 터질지 모른다는 점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 회계비리의 본질이 기업 경영진과 월가, 회계법인의 공조에 의한 총체적인 금융 부정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결국 문제가 빠른 시일 내에 쾌도난마식으로 해결될 순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워싱턴 정가에서는 이 문제가 정치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9일 월스트리트를 방문해 비리를 저지른 경영진의 형사 처벌을 포함한 회계 규제안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나 발표에 앞서 의회 쪽에선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비판을 미리 제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기업회계에 대한 감독권한 강화를 추진하고 있는 SEC에 대해서도 최근 톰 대슐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가 하비 피트 위원장의 자질을 문제삼아 교체를 요구한 것을 비롯해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총체적 비리의 매듭이 이리저리 얽혀 있는 데다 이 문제가 정쟁의 대상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분식회계 문제의 빠른 해결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분식회계 파문이 확산되는 와중에 문제해결의 당사자 중 하나인 행정부와 의회 인사들이 기업비리에 연루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미 경제와 정치가 총체적인 부패 스캔들에 휩싸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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