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래의 CEO스토리]'벤처대부' 이민화 회장을 추억하며

  • 등록 2019-08-17 오후 1:06:23

    수정 2019-08-18 오전 11:19:09

고(故)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이데일리 강경래 기자] 기자는 지난 16년 동안 전국 1200개 이상 중소중견기업들을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일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그렇게 발품을 팔아온 덕에 중소중견기업 업계에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카이스트 교수)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한 좌담회는 낯설기만 했다. 당시 주제가 ‘교육’이어서인지 이민화 회장 외에 아는 이들이 없었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이 회장은 현장에 모인 이들에게 “(강 기자는) 벤처업계 마당발입니다. 벤처인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라고 기자를 소개했다. 분명 과장이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자칫 교육에 대한 비전문가로서 위축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회장이 기자의 면을 살려준 셈이다.

이민화 회장이 지난 3일 향년 66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평소 등산을 하며 건강을 유지했던 이 회장. 그는 별세하기 하루 전만 해도 대전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4차산업혁명’을 주제로 강의를 한 후 서울로 올라온 상황이었다. 이렇게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던 이 회장. 하지만 지병이었던 부정맥에 의해 이날 아침에는 깨어나지 못한 채 영원히 잠들었다.

‘벤처대부’의 갑작스런 별세에 벤처업계와 함께 그를 아는 이들 모두는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당일 서울아산병원에는 장례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회장과 구관영 에이스테크놀로지 회장,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 안건준 벤처기업협회 회장(크루셜텍 대표) 등 벤처업계를 대표하는 이들이 빈소를 찾아 아픔을 함께 했다. 또한 그가 떠난 후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기자와 같이 이 회장과 인연이 있는 이들이 모두 한두개씩 추억담을 꺼냈다. 그렇게 이 회장은 기자를 포함해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의미 있는 추억을 남긴 체 세상을 떠났다.

1953년 대구 출생인 이 회장은 1976년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전기·전자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부터 4년간 대한전선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그는 1985년 우리나라 벤처업계 1세대 기업인 메디슨을 창업했다. 이 회장이 창업한 메디슨은 국내 최초로 초음파진단기를 출시하는 등 현재까지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 산파 역할을 했다. 메디슨은 이후 삼성전자가 인수한 후 삼성메디슨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회장은 평소 메디슨 직원들에게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며 언제든 창업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김진태 유투바이오 대표와 길문종 메디아나 대표, 김종철 맥아이씨에스 대표, 강동주 바이오넷 대표 등이 메디슨 출신 기업인들이다. 김진태 대표의 경우 메디슨 직원이었던 1992년 당시 사내벤처로 유비케어를 창업했다. 유비케어는 이후 병의원용 전자차트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면서 창업 5년 만에 코스닥 시장에 입성했다. 김 대표는 유비케어 이후 또 다시 2009년 체외진단 검사업체 유투바이오를 창업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또한 메디아나는 심장충격기(제세동기), 맥아이씨에스는 인공호흡기, 바이오넷은 생체신호계측기 분야에서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김진태 대표는 “이 회장은 나에게 있어 선배 기업인이자 스승이었다. 그는 늘 직원들에 기업가정신을 강조하고 창업을 독려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기업가 외에도 우리나라 벤처업계 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1995년에는 벤처기업협회를 설립해 5년간 초대회장을 지냈다. 그가 설립한 벤처기업협회는 현재 회원사 약 1만 4000개를 보유한 거대 단체로 성장했다. 이 회장은 협회를 창립할 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벤처기업은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모방을 통해 빠르게 따라가는 추격자)가 아닌 ‘퍼스트 무버’(First mover·시장선도자)가 돼야 한다. 둘째, 벤처기업을 위한 금융은 융자가 아닌 투자가 돼야 한다. 셋째, 벤처기업 직원은 언제든 창업할 수 있도록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게 그것이었다.

이 회장은 이 같은 3가지를 실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그 결과 1996년에 벤처기업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한 코스닥 시장이 문을 열 수 있었다. 이 회장은 1997년 벤처기업 육성을 명시한 ‘벤처기업특별법’ 제정에도 기여했다. 이 회장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서울대·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60인의 엔지니어’에 선정됐다. 2009년에는 초대 중소기업옴부즈만 기업호민관으로도 임명됐다.

이 회장은 정부와 업계를 위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4차산업시대를 맞아 벤처생태계도 변화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정부는 반드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안건준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이 회장은 벤처기업인들과 만날 때면 늘 4차산업시대에 걸 맞는 벤처생태계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아가 데이터 이용과 활용 등에 있어 정부가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회장이 떠난 후 비서인 신수진 창조경제연구회(KCERN) 팀장이 지인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평소 주말도 없이 일하시는 이 회장께 ‘좀 쉬시면서 일하시라’고 조언했다. 돌아온 말은 ‘(지병 때문에) 언제 떠날지 모르니 하루라도 더 열심히 일해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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