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는 여전히 재미있지만, 이젠 다른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
때늦은 고백일까, 노장의 변덕일까.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가 최근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앞으로는 연기보다는 작곡에 더 몰두하고 싶다”고 밝혔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영화 ‘양들의 침묵’ ‘한니발’ ‘순수’를 비롯해, 지난 30년 동안 약 70편의 작품을 찍으면서 쉬지 않고 연기해온 홉킨스다. 그런 그가 일흔이 다 된 지금 “이젠 그림이나 작곡에 더 몰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조금은 뜬금없는 발표가 아닌가?
“토니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군요. 토니의 꿈은 원래 영화배우가 아니라 피아니스트였어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들에게 홉킨스의 피아노 공연을 기획한 영화음악 제작자 말콤 루커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루커는 “토니의 연주를 들어보면 다들 놀랄 것”이라며 “그는 대단히 뛰어난 피아니스트”라고 덧붙였다. ‘토니’는 홉킨스의 애칭이다.
▲ 지난달 5일 미국 LA에서 열린‘베오울프’시사회에 참석한 앤서니 홉킨스. 홉킨스는 이 영화에서 흐로스가 왕 역을 맡아 변하지 않은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조선일보 DB, AP |
앤서니 홉킨스의 이력을 뜯어보면, 루커의 말대로 그의 피아노 공연이 단순히 ‘노인의 뒤늦은 변덕’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피아노를 배운 건 어린 시절부터.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쇼팽의 피아노 곡을 듣고 마음을 빼앗겨 피아노를 배우게 됐다고. 11살 때부터는 혼자 ‘이상한 노래’(awful songs)를 지어 부르는 습관이 생겼다. 영국 카디프 시 ‘웨일스 예술대학(Welsh college of music and drama)’을 다니던 시절에도 그가 장학금을 딸 수 있었던 건 연기가 아니라 피아노 연주 덕이었다.
“대중 앞에서 공연을 잘 안 해서 그렇지, 피아노는 줄곧 내 친구였어요.” 홉킨스의 말이다.
음악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치료제’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홉킨스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술을 끊은 것은 1975년, 이때부터 피아노 연주는 그의 스트레스나 분노를 달래주는 도구가 됐다. 영국 BBC의 라디오 채널4에서 진행하는 정신분석 프로그램에 출연한 홉킨스는 “분노를 떨쳐내기 위해 피아노를 친다. 가끔은 연주하다 울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홉킨스는 이제 술은 입에도 안 대는 대신, 최근에 사들였다는 20만 달러(약 1억 8000만원)짜리 ‘뵈젠도르프’ 피아노를 치며 마음을 다스린다.
‘은밀한 즐거움’이었던 피아노 연주를 홉킨스가 대중들에게도 들려주겠다고 나선 건, 큐레이터인 세 번째 아내 스텔라 아로야브(Stella Arroyave)의 영향이 컸다. 스텔라는 홉킨스에게 빈둥대며 사는 법과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 “재미있으면 그냥 하라”는 식의 낙천주의를 가르쳐줬다. 아내의 권유로 말리부 해변으로 이사한 것도 모자라, 작년엔 그저 “무작정 그렸다”는 그림을 모아 ‘꿈의 풍경(Dreamscapes)’이라는 전시회까지 열었다.
홉킨스는 “사람들이 대체 내 그림을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나는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도 모른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을 얻은 듯하다. 아내의 권유로 올해 초엔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하고 출연까지 한 영화 ‘슬립스트림(Slipstream)’을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했고,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도 직접 작곡했다.
“난 이제 더 이상 내 존재를 보여주려고 애쓰지 않을 거다. 난 이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기로 했고, 재미있는 것들을 받아들이며 살기로 했다. 난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고 견고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 일흔의 배우는 어쩌면 이제서야 자신의 재능을 토대로 즐겁게 사는 법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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