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rd SRE][editor's note]수술이냐 모르핀이냐

  • 등록 2022-11-21 오전 9:30:00

    수정 2022-11-21 오전 9:30:00

[이데일리 권소현 마켓IN센터장] 요새 금융시장을 보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극한 직업은 한국은행 총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플레이션과 사투를 벌이며 미국 금리인상을 따라가기에도 벅찬데, 금융시장이 얼어붙으니 다들 한국은행에 자금을 공급해달라고 아우성이다. 긴축인 듯, 긴축 아닌, 긴축 같은 통화정책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2년 만에 정상화되나 싶었는데 금융시장은 다시 격랑에 휘말리고 있다. 생각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유가가 급등하고 공급망이 붕괴했다. 미친 듯이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빠르게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역대급 속도로 금리를 인상하니 한국도 따라가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다.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소규모 개방경제국의 설움이기도 하다.

경제주체들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이 미국 따라 금리를 올리다 보니 곳곳에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물가는 확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금융시장에서는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이다.

부동산 경기가 꺼지고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단기자금시장으로까지 옮겨왔다. 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은 두자릿수 금리를 주고서야 간신히 발행가능하고 만기도 갈수록 짧아져 15일짜리도 나온다. 돈 급한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이 안되니 기업어음(CP) 시장으로 몰리면서 91일 CP 금리는 13년만에 5%를 넘어섰다.

코로나19때 금융시장을 풀기 위해 썼던 카드가 대거 다시 등장했다. 채권시장안정펀드부터 한국은행의 적격매입대상증권 확대, 환매조건부증권을 통한 자금공급 등. 그런데도 시장은 더 내놓으라고 난리다. 저신용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사들이는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까지 가동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인플레이션은 고삐를 확실하게 조여서 잡아야 하는데 한은으로서는 참 난감한 상황이 됐다.

일각에서는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시장이 너무 모르핀에 익숙해졌다는 얘기도 한다. 모르핀은 자주 쓰다 보면 내성이 생긴다. 그때마다 더 투약강도를 높여야 하고, 그래도 효과가 나지 않는 상황에 이르기도 하다.

모르핀 이후도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문제가 터졌던 곳은 수술이 불가피하고 투자잣대는 좀 더 깐깐해질 것이다. 한숨 돌릴 시기가 오면 규제가 따라올 수 있다. 고위험 투자에 서슴없이 나섰다가 문제가 생겼고 유동성 지원을 받았으니 다음 순서는 필연적으로 규제 강화다. 생각보다 비싼 모르핀 청구서가 날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위기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모르핀 없이 견뎌낸다면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걸러내고 솎아낼 기회를 제공한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경제 체질이 상당히 바뀌었고 빚을 내 문어발식 확장하던 기업들의 경영 방식도 달라졌다. 한계기업들은 대거 정리가 됐다.

막힌 곳은 뚫어주되 이 유동성 위기만 넘기면 괜찮아질 곳인지, 아니면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수준에 그칠 곳인지 가려내야 한다. 모르핀보다는 지금은 곪은 곳을 도려내는 과감한 수술을 고민해야 할 때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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