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사세대의 눈물]입시난·취업난 넘었더니 어느덧 마흔 "이젠 명퇴 걱정"

저주받은 94학번 수능 두번에 졸업하자 외환위기
취업난 뚫었더니 평생직장 없는 전쟁터
내년엔 마흔 이젠 명퇴걱정..'응사'보며 좋았던 시절 추억
  • 등록 2013-12-13 오전 9:30:00

    수정 2013-12-13 오후 6:33:57

[이데일리 장종원 기자]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김성수(39·가명)씨는 94학번이다.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에 등장하는 바로 그 세대다. 그는 요즘 금요일 저녁마다 드라마 ‘응사’를 통해 추억여행을 떠난다.

그가 기억하는 1994년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김일성 사망, 지존파 사건, 성수대교 붕괴 등등. 하지만 그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대학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중년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는, 삶에 찌든 아저씨지만 그에게도 꿈 많고 패기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

‘학사경고’ ‘주사파’가 넘쳐놨던 1994년

김씨는 1994년 지방의 한 국립대에 입학했다. 한해에 시험을 두 번이나 치른 수학능력시험 1세대로, 2차 베이비붐 세대의 엄청난 경쟁률을 뚫었다. 당시는 평균 대학입시 경쟁률이 4~5대 1에 달하던 때였다.

지금처럼 서울 소재 대학 선호현상이 심하지는 않았다. 지방 국립대는 인기가 있었고 나름 자부심도 있었다. 그는 “첫 등록금이 대략 60만원 정도로 기억한다”며 “나름 친척들한테 효자 소리도 들었던 때”라고 회상했다.

그가 발을 디딘 대학은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었다. 1학년 때부터 취업에 매달려야 하는 지금 대학생들한테는 미안할 정도다. ‘학사경고’ 한 번쯤은 당연한 통과의례였고, ‘주삼파’(주 3일 학교에 오는 학생 혹은 주 3일 술을 먹는 학생), ‘주사파’가 회자되던 시기였다. 학과 동기 선후배의 자취방은 술꾼들의 아지트였다. 적어도 1998년 이전까지는 그랬다. 그때는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낙관과 희망이 더 컸다.

당시 학생운동의 열기는 예전에 비해 많이 꺾였다. 그래도 일주일에 2~3일은 크고 작은 집회가 열렸다. 그는 경찰들이 시위대를 쫓아 학교 정문에서 걸어서 족히 10분은 떨어진 사회대까지 진입한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수업 중이던 그를 포함해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뛰쳐나와 경찰을 쫓아버렸다. 민주화에 대한 암묵적 공감대가 있었고, 학생운동하는 친구와 선배에 대한 부채 의식도 있던 때였다.

외환위기 이후 180도 달라진 세상

하지만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대학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1997년 터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세상을 완전히 바꾼 것이었다. 졸업을 앞둔 92, 93학번 선배들은 취업길이 막히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심지어 자동차 영업이나 외판원을 선택한 선배도 있었다. 세상을 낙관했던 후배들에겐 충격이었다.

후배들도 많이 바뀌었다. 외환위기 이후 들어온 후배들은 1학년 때부터 공부에 열중했다. 학부제라는 새로운 학사제도도 도입됐다. 외환위기가 좀 진정되자 어학연수 붐이 고개를 들었다. 학생회나 사회과학 동아리들은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전통을 자랑하던 사회과학 동아리 몇 곳은 결국 문을 닫았다. 김씨와 복학생 동기들은 “대학이 이러면 안된다”고 후배들을 향해 혀를 찼지만, 그들도 결국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에 바빴다.

사회에서는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사오정’(45세면 정년퇴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기피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998년 당시 통계청 사회통계를 보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응답이 33.7%에 그쳤다.

부동산값 폭등, 정리해고, 그리고 하우스푸어

세상은 요동쳤지만 김씨의 삶은 꽤 순탄한 편이었다. 외환위기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2000년 서울의 한 중견기업에 취업했다. 하지만 평생 직장의 개념의 사라진 회사는 전쟁터와 같았다. 직급이 오르고 연차가 쌓이면서 급여나 처우 또한 나아지긴 했지만 언제나 고용 불안을 걱정해야 했다. 게다가 혀를 찼던 후배들은 외국어 실력과 각종 자격증까지 보유한 경쟁력 있는 직원으로 들어와 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가 한번 있었다. 김씨는 서울로 올라오면서 부모님의 도움과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돈으로 1억3000만원짜리 작은 아파트를 샀다. 낡아서 춥고 더웠던데다 주차 문제로 매일 같이 주민들 간에 고성이 오가던 곳이었다.

“2002년으로 기억하는데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전화가 와서 시세에 2000만원을 더 줄테니 팔라는 거에요. 고민할 것도 없이 집을 정리하고 분당에 깨끗하고 큰 평수의 전셋집을 구했지요.” 그 아파트는 몇 년만에 10억원을 훌쩍 뛰어 넘었다. 김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속이 쓰린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 용기는 없었다. 덕분에 다른 친구들처럼 ‘하우스푸어’로 전락하는 사태는 면했지만 매년 치솟는 전셋값을 감당해야 하는 생활이 언제나 끝날지 모른다.

“내 나이 마흔”… 어떻게 살아온 걸까?

김씨는 요즘 자주 우울감에 빠진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좀 지쳤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감상에 젖을 여유도,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

하지만 아직 갈 길도 멀다. 이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면 어학 연수도 보내야 하고 외고에도 입학시켜야 한다. 지긋지긋한 전세생활도 끝내야 하고 다가올 노후도 준비해야 한다.

나이가 마흔이건만 남겨진 숙제는 아직도 산더미다. 언제까지 자신의 능력이 받쳐줄 지는 의문이지만, 가족들을 위해서는 적어도 50대 중반까지는 회사에서 버텨야 한다.

젊었을 때의 패기는 사라졌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됐을 땐 잠시 충격을 받기도 했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나”라는 반감이 들었지만 “선거로 뽑았으니 인정해야지”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최근 들려오는 국가기관의 광범위한 선거 개입 논란은 충격적이지만 옛날처럼 뛰쳐나갈 수는 없다.

“난 누구의 남편이자 누구의 아빠였거든요. 애꿎은 술잔에 화를 풀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얼마 전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시청하다 하숙생들이 야밤에 둘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다 울컥했다. 슬픈 장면도 아니었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자취방에서 동아리방에서 밤을 새워 세상을 이야기했던 시절이 그리워 가슴이 먹먹해진 것이다.

그는 그날 밤 대학시절 즐겨 부르던 민중가요 가사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지 않을까?’

나이 마흔에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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