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이상아(22·연세대 법대3년)씨는 3일 남자친구 생일선물을 사이버머니인 ‘도토리’(싸이월드에서 통용되는 가상화폐)로 샀다. 아이템 거래 사이트인 ‘폰즈’에 글을 올려 도토리 300개를 문화상품권 2만5000원짜리와 바꾼 뒤, 통합 마일리지(한 업체에서 쌓은 마일리지를 여러 곳의 업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 사이트인 ‘포인트뱅킹’에 접속, 영화표 2장과 책으로 바꿨다.
안정미(23·연세대 신방3년)씨는 도토리로 휴대전화를 값싸게 걸고 있다. 도토리를 활용해 한 달치 휴대전화 요금 감면 신청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교통카드 충전과 백화점 상품권도 도토리로 구입한다. 안씨는 “친구 중에는 도토리를 이용해 화장하고, 외식상품권으로 식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도토리나 알(KT F)·루찌(카트라이드)·아데나(리니지) 같은 사이버머니는 한두 개 중개사이트를 거치면 손쉽게 실제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 사실상 현금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SK의 마일리지 서비스인 ‘OK 캐쉬 백’은 아예 중개사이트조차 거칠 필요가 없다. 마일리지 포인트만 있으면, 외식·주유·숙박 등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 노래방도 가고, 홈쇼핑도 할 수 있다. OK 캐쉬 백을 현금처럼 받아주는 가맹점 점포가 4만개가 넘는다. 의식주(衣食住)가 모두 해결되는 사실상의 화폐다.
◆IT기술이 공간의 벽을 허물다
가상공간에서만 유통되던 사이버머니가 거리로 나왔다. 특정 사이트에서 아바타 등 사이버 용품을 구매하거나, 포인트로만 적립됐던 사이버 공간 전용(專用) 통화가 ‘가상(假想)세계의 벽’을 뚫고 나와 실물 통화로 변신하고 있다.
준(準)화폐 역할을 하는 사이버머니는 줄잡아 1조3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업계는 추정한다. 현금처럼 유통되는 게임아이템 머니 1조원에 SK의 ‘OK 캐쉬 백’ 마일리지 잔고가 2200억원, 도토리·별·은화 같은 특정 사이트의 가상화폐 1500억원 등이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나선 정부, 반발하는 기업
사이버머니가 거리로 나오면서 예기치 못한 부작용도 나오고 있다. 아이디 도용과 해킹 등을 통한 절도 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고, 돈세탁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도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따라 거리로 나온 사이버머니에 대한 감시감독을 강화하려는 정부의 조치가 준비되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올 정기국회에서 ‘전자금융거래법’을 제정, 사이버머니 중 환금이 쉽고, 사용범위가 가장 넓은 ‘OK 캐쉬 백’을 규제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회사 재무상태가 괜찮은지 점검하고, 제휴사업 내용 등도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검사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SK측은 마케팅 차원의 ‘OK 캐쉬 백’ 사업을 금융의 관점에서 규제하려는 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SK 관계자는 “소비자는 갈수록 편리한 기능을 추가하기를 원하는데 정부가 금융 차원에서 규제할 경우, 소비자 불편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 규제가 사이버머니의 ‘화폐화(化)’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분야 전문가인 와튼 비즈니스 스쿨의 코브린 교수는 “사이버머니는 통화당국이 알지 못하는 영역을 현저히 확대해, 중앙은행의 통화공급량은 더욱 부정확한 개념이 되고, 외환거래도 추적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소비자보호원 정윤선 박사는 “앞으로 전통적인 금융규제의 테두리로는 담을 수 없는 많은 사례가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