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하정민기자] 세계 유명 최고경영자(CEO)들이 줄줄이 낙마하고 있다. IT업계의 여제로 불렸던 HP(휴렛패커드)의 칼리 피오리나, 보잉의 해리 스톤사이퍼,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 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스너, 미국 보험업계의 대부 모리스 그린버그까지 최근에 물러난 스타 CEO만 해도 줄을 잇는다.
거물급 CEO들의 잇따른 낙마 원인은 실적 부진, 회계 부정, 도덕성 추락 등으로 다양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이사회의 영향력 강화에서 찾아야한다는 분석이 많다.
`거수기`, `고무도장` 등의 비난을 받았던 과거와 달리 엔론 사태 이후 기업 이사회가 적극적인 감시자 역할을 하며 CEO들을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회가 최고경영자의 실적과 사생활은 물론 기업문화, 급여 체계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날로 두드러지고 있다.
◇이사회 눈 밖에 나면 즉시 퇴출
이사회 눈에 벗어나 물러난 대표적인 CEO는 칼리 피오리나 HP 전 최고경영자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 기업인`으로 불리며 연예인 못지않은 인지도를 구가해온 피오리나의 사임은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HP 이사회가 긴급회의를 열어 피오리나에게 사임을 요구하는 바람에 피오리나가 쫓겨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사회의 위상 강화에 대한 분석이 속속 제기되기 시작했다.
지난 7일에는 미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이사회의 영향력 강화를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전자업계 간판기업 소니는 지난 10년간 회사를 이끌어온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과 안도 구니타케 사장의 동반 퇴진을 결정했다. 이데이의 후임으로 하워드 스트링어 소니 부회장을 지명해 소니 사상 최초로 외국인 CEO를 탄생시켰다.
이데이 회장은 퇴진이 자신의 결단임을 강조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대교체가 불가피하다는 사외이사들의 목소리를 경영진이 수용한 것이라는 분석이 더 많다. 미국에서는 사외이사들이 경영진 교체에 나선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이번이 처음이고 그 대상이 일본의 자존심 소니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상당한 화제를 불러모았다.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AWSJ)은 소니의 경영진 교체가 경직된 일본 기업문화의 대대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특히 날로 강력해지고 있는 사외이사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날 미국에서는 최대 항공기 생산업체 보잉이 여성 임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해리 스톤사이퍼 CEO를 경질했다. 스톤사이퍼는 2003년 취임 후 보잉 주가를 두 배나 끌어올리는 등 우수한 경영 능력을 발휘했지만 섹스 스캔들에 휘말려 회사 이미지를 추락시켰다는 이사회의 엄중한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3일에는 월트디즈니가 가세했다. 디즈니 이사회는 1984년부터 21년간 디즈니를 이끌어온 마이클 아이스너 CEO의 퇴진을 발표했다. 당초 아이스너의 퇴진 시기는 내년 9월로 알려졌지만 디즈니 이사회는 회사 내홍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퇴진 시기를 1년 이상 앞당겨 그를 내쫓기로 결정했다. 잘 알려진대로 아이스너는 디즈니의 후손과 극심한 경영 분쟁을 빚었고 미라맥스, 픽사 등 유명 배급사와의 결별도 아이스너의 독선적 성격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루 뒤인 14일에는 세계 최대 보험회사 AIG의 모리스 그린버그 CEO 자리에서 물러날 전망이란 소식이 전해졌다. 그린버그는 무려 40년간 AIG를 통치하며 `보험업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렸지만 부정회계 및 담합입찰 혐의 조사로 이사회의 우려가 가중되자 결국 버텨내지 못했다.
◇경영실적과 도덕성은 기본..플러스 알파까지 필수
물러난 경영자들의 면면을 보면 이사회가 CEO에게 요구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수한 실적, 높은 수준의 도덕성은 물론 회사 이미지를 개선시켜야 한다는 특명도 뒤따른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을 요구하는 셈이다.
일단 실적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HP의 피오리나와 소니의 이데이의 해고 이유도 이에 해당한다. "돈을 벌지 못하는 CEO는 필요없으며 이사회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무조건 기대수익 이상의 돈을 벌어오라"는 의미다.
최근 수 년간 CEO들의 연봉이 치솟으면서 이사회의 실적 요구는 더욱 깐깐해지기 시작했다. 높은 연봉을 받는만큼 밥값을 해야하며 이사회가 굳이 행동을 취하지 않더라도 주주들의 반발로 쫓겨날 가능성도 높다.
도덕성도 중요하다. 경기 확장기에 적합한 인물이라도 문란한 사생활을 가진 CEO는 환영받지 못한다. 보잉의 해리 스톤사이퍼가 대표적이다. 스톤사이퍼의 퇴진을 발표한 루 플래트 보잉 회장은 "CEO는 흠잡을 데 없는 전문성과 도덕성의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며 CEO 요건 중 도덕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실적과 도덕성에 별 문제가 없더라도 회사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아이스너와 그린버그의 퇴진은 아무리 뛰어난 실적을 올렸다 해도 내분이나 회계부정에 휘말려 회사 이미지를 추락시킨 경영자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증명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기업 이사회가 `포스트 엔론(post-Enron)시대`를 맞아 엄격한 관리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평가한다. 한때 미국 최고 에너지 기업이었지만 분식회계 등 경영진의 온갖 불법 행태로 무너진 엔론이 미국 사회 전체 신뢰도를 추락시켰던 경험이 이사회의 권한 강화와 CEO에 대한 적극적인 감시역할로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지금은 모든 CEO들이 투명성과 책임, 그리고 행동의 세계에 살고 있다"며 "CEO는 뜨거운 자리이며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신문은 CEO들의 임기가 선출직 공직자의 임기와 점점 흡사해지고 있으며 CEO들의 부담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미국 재취업 전문업체 챌린저그레이&크리스마스에 따르면 지난 2월에만 무려 103개 기업의 CEO가 교체됐다. 2001년 이후 가장 많은 수치다.